[한겨레 프리즘] 대통령의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 이세영

이세영 2020. 9. 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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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

정치팀장

‘시무 7조’라는 글이 궁금하던 터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들어가 보았다. 표현의 장황함과 풍자의 작위성이 거슬리긴 했어도, 재주와 글품이 녹아 있는 문장은 보수 진영의 환호를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정작 내 눈길을 끈 것은 메시지보다 텍스트의 형식이었는데, 글쓴이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글이 취한 ‘소’(疏·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형식은 ‘선출제 군주정’을 닮아가는 한국 민주주의의 비루함을 그 자체로 겨냥한 게 아니었나 싶었다.

물론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비판은 새로울 게 없다. ‘대통령 권력의 왜소함’을 들어 그 비판을 수용하지 않았던 건 민주화 이후 모든 대통령이 매한가지였다. 문재인 대통령이라면 ‘야당과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막혀 속 시원히 적폐청산도 못 하는 제가 왜 제왕적입니까?’라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개혁을 추구한 모든 정권에서 ‘반대 세력의 저항’이 상수가 아닌 적은 없다. 중요한 건 그들을 설득해 개혁의 흐름에 합류시킬 능력과 의지가 있느냐다. 설득에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든다. 당장의 성과에 급급하면 머릿수와 힘으로 찍어눌러 상대를 무력화하려는 유혹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촛불혁명’ 이후 등장한 문재인 정부의 태생적 특수성을 이야기한다. 누적된 특권과 불의, 불공정과 불평등의 시스템을 혁파할 소명을 위임받았다는 점에서, ‘문재인 청와대’에는 처음부터 군주에 필적하는 주권자적 결단과 실행의 비르투(Virtu·역능)가 운명적으로 요청되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집권 초 문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 돈 “이니 맘대로 해”라는 언설은 이러한 위임 민주주의적 현실 인식의 구어적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문제는 제도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정치 현실에서 청와대가 독주하는 개혁은 지속성을 갖기 어렵다는 점이다. 존재 기반이 위협받는다고 느낀 세력은 사력을 다해 저항할 것이고, 힘으로 몰아치는 여당 앞에서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야당은 없는 까닭이다. 결국 현실은 ‘입법 교착’이 장기화하고 의회에서 조정되어야 할 정치적 갈등이 폭넓고 첨예한 진영 대결로 확전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

모든 것의 해결을 공언했으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통치자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지지층을 붙들어 두려면 메시지를 통해 진심을 전달하고 뭉클한 의전으로 감동을 선사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는 건조한 통치술을 넘어 미학화된다. ‘미학화된 정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가 아닌 ‘문제의 표현’에 집중하는 정치, 문제 해결이 안 되는 상황을 견디게 만드는 정치다. 청와대 게시판에 초법적 청원이 쇄도하는 상황과 정치의 미학화는 함께 간다.

통치 리더십의 쇄신이 절실한 상황에서 여권이 기대할 것은, 지도부를 교체한 민주당이 집권당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사이 청와대 권력의 기세는 부동산 파동과 의정 갈등을 겪으며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여당 지도부가 기억할 것은 후보 시절의 문 대통령도 집권하면 ‘문재인 정부’가 아닌 ‘민주당 정부’의 이름으로 국정운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사실이다.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과 소통하며 반대파를 설득해 법과 정책을 만드는 것은 정당과 의회의 몫이라는 점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마키아벨리를 재해석한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그람시는 “오늘날 새로운 군주론의 주인공은 개인적 영웅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정당일 수밖에 없다”고 썼다. 카리스마적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고 그들의 의지를 조직하는 정당이야말로 현실의 갈등과 난관을 조정하고 헤쳐나가는 ‘현대의 군주’라는 얘기다. 대선까지는 2년이 채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민주당과 국회의 시간이다. 두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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