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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도 놀랄, 찬란한 1700년전 가야 구슬공예, 이제야 보물 된다

입력 2020. 09. 0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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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우대,가야홀대 이어지다 최근 가야사 재조명
경북서 전남까지 남해안 광역세력, "문화적 우위"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이 해방후에도 사학계 주류로 이어지고 역대 정권들도 4국시대 중 신라를 과도하게 치켜세우는 과정에서 홀대받던 가야 문화재 중, 찬란했던 가야 구슬 공예가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에서야 비로소 보물로 인정받게 됐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가야 시대를 대표하는 두 고분인 김해 대성동 및 양동리 고분에서 출토된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 등 목걸이 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국민 누가 보더라도 이게 과연 1700년전 기술인가 놀랄정도로 찬란한 모습이라는게 중론이다.

1700년전 가야 구슬공예.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

이번에 지정 예고된 목걸이 3건은 ‘철의 왕국’으로만 주로 알려져 있는 가야가 다양한 유리 제품 가공 능력도 뛰어나 고유한 장신구 문화를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출토 정황이 명확하고 보존상태가 좋으며 형태도 완전하여 역사‧학술‧예술 가치를 지닌 보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가야인들은 수정이나 마노를 주판알 모양으로 깎거나 유리 곡옥이나 둥근 옥을 만들어 목걸이로 착용했다. 구슬의 재질도 금, 은, 유리, 금박 입힌 유리, 수정, 호박, 비취 등으로 다양하며, 형태도 판옥(板屋, 편평하게 가공한 옥제품), 곡옥, 대롱옥(대롱처럼 기다란 형태의 옥제품), 다면옥(多面玉, 여러 면을 깎은 옥제품) 등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가야 유적은 경남 김해, 경북 고령, 전남 함평 등에서도 발견되는데, 가야는 남해안의 동서에 걸쳐 광대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일본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활발한 대외 개척활동을 벌인 것으로 평가된다.

강단사학과 향토사학 등을 종합하면, 경북 동북부와 강원남부의 실직국, 경북 중북부의 의성-문경-상주일대의 조문국 등이 최장 6세기초까지 독립국가로서 건재했음을 감안하면, 신라의 세력권은 크지 않았고, 가야 세력은 매우 강력했음에도 마치 영남지방 전부가 일찌기 신라의 강역인 것으로 과장된 면도 없지 않다. 신라의 세력이 미약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후부터 5세기까지 영남 역사에는 공백이 크다.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 곡옥 부분 확대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는 1994년 동의대학교박물관이 목곽묘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함께 발굴된 유물 중 중국 한대(漢代) 청동 세발 솥(靑銅鼎, 청동정) 등을 통해 3세기 경 축조된 금관가야 시대 고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목걸이는 수정제 곡옥 147점, 대형 수정제 다면옥 2점, 마노 환옥 6점, 파란 유리 환옥 418점, 유리 곡옥 1점 등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보석 총 574점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경도 7의 단단한 수정(水晶)을 다면체로 가공하거나 많은 수량의 곡옥(曲玉) 형태로 섬세하게 다듬은 제작 방법은 가야인들의 기술 면모를 보여준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3세기 대까지 유행한 가야의 장신구는 수정이나 마노를 주판알 모양으로 깎거나, 유리로 곱은옥(曲玉)이나 둥근옥(球玉)을 만든 목걸이였다. 김해 양동리 322호분에서 출토된 목걸이는 이러한 가야 구슬 목걸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투명한 수정을 육각형으로 다듬고 거기에 붉은색 마노와 푸른색의 유리옥을 더하여 영롱한 빛으로 조화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도 발굴해서 얻은 유물이라 출토지와 유물의 내역이 분명하고, 수정제 곡옥이나 대형 유리제 곡옥이 한꺼번에 발견된 희귀한 사례로서 중요하다. 또한, 수정을 정교하게 가공한 기술과 다채로운 색채와 질감이 조화를 이룬 조형의식이 돋보여 당시 장신구 문화의 세련된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3세기 금관가야의 지배층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귀중한 장신구로서 보물로 지정할 역사‧예술 가치가 충분하다.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는 3세기 말~4세기 초 금관가야 때 것이다. 색감의 조화가 뛰어나다.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는 3세기 말~4세기 초 금관가야(金官伽倻) 시기 중요한 고분 중 하나인 김해 대성동 76호 고분에서 2011년 대성동고분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다가 목곽묘에서 발견했다. 금관가야는 기원전후 부터 서기 532년까지 경남 김해를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 지역에 존속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3~5세기 무렵 금관가야 시대 수장층(首長層)의 공동묘지이다.

문화재청은 이 고분군이 한국고대사에서 공백으로 남은 4세기 전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귀중한 자취라고 평가했다.

목걸이는 서로 길이가 다른 3줄로 구성되었고 수정제 구슬 10점, 마노제(瑪瑙製) 구슬 77점, 각종 유리제 구슬 2386점 등 총 2473점으로 이루어졌으며, 평균 지름이 6~7㎜ 정도로 아주 작은 형태로 다듬은 것으로 보아 여기에 깃들인 가야인들의 시간과 정성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마노(瑪瑙)는 수정과 같은 석영광물로서, 원석의 모양이 말의 뇌수(腦髓; 머릿골)를 닮았다고 해서 이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맑고 투명한 수정과 주황색 마노, 파란색 유리 등 다종다양한 재질과 색감을 조화롭게 구성한 것이 특색이다. 유리를 곡옥(曲玉)이나 다면체 형태로 섬세하게 가공하고 세밀하게 구멍을 뚫어 연결하거나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는 등 조형적인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 당시 유리세공 기술이 매우 우수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고대 구슬 제작방법은 두 가지 종류가 있음. 하나는 주형(鑄型) 기법으로, 일정한 틀에 재료를 녹여 부어서 만든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잡아 늘리기 기법’으로, 녹인 유리질 속에 막대를 넣고 잡아 늘려 식힌 다음 일정한 크기로 자르는 식이다. 가야 시대 유리구슬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해 만들었다.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는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발굴조사를 통해 나온 터라 출토지와 유물의 내역이 분명하고, 여러 재료를 정교하게 가공해 색상과 질감을 조화롭게 배치한 가야인들의 수준 높은 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금관가야 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공예품으로 역사․예술 가치가 충분한 유물이다.

김해 양동리 270호분 출토 수정목걸이

또 다른 목걸이인 김해 양동리 270호분 출토 수정목걸이는 1992년 동의대학교박물관의 제2차 발굴 조사 중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에서 발굴되었다. 양동리 고분 270호는 인접한 여러 고분과 겹쳐 있어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으나 고배(高杯, 높다리 그릇)를 비롯해 토기류나 철제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가야인들의 생활상을 알려 주는 중요한 고분으로 꼽힌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선 1984년 이후 557기의 유구에서 5100여 점의 유물을 출토했고 특히, 여러 색의 크고 작은 유리구슬들을 다량 발견했다.

김해 양동리 제270호분 출토 목걸이는 수정제 다면옥(多面玉) 20점과 주판옥 120점, 곡옥(曲玉) 6점 등 총 146점의 수정으로 구성되었다. 전체 약 142.6cm의 길이에, 육각다면체형, 주판알형, 곡옥형(曲玉形) 등 여러 형태로 수정을 다듬어 연결했으며, 제작 시기는 고분의 형식과 부장품 등으로 보아 3세기로 추정된다.

영롱하고 맑은 투명 무색과 황색, 갈색 등이 약간 섞인 은은한 색의 수정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었고, 형태와 크기가 다른 수정을 조화롭게 배치해 조형성이 매우 뛰어나다. 목걸이를 구성하고 있는 수정(水晶)은 한동안 외국산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학계의 연구를 통해 경상남도 양산(梁山) 등 우리나라 지역에서 생산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수정목걸이는 3세기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지배계층의 장신구로서, 3~4세기 가야 유적에서 다수 출토되었으나, 이 목걸이처럼 100여점 이상의 수정으로만 구성된 사례는 매우 희소하다. 또한, 가공 기법 또한 오늘날의 세공기술과 비교해도 될 만큼 완전성이 뛰어나 당시 수준 높은 기술과 세련된 미적(美的) 감각을 보여준다. 이 시기를 대표할 수 있는 중요한 공예품으로서 기술‧예술 수준이 뛰어나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문화재청은 평가했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가야 목걸이 3건은 각각 개별 유적에서 일괄로 발견되었고, 금관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 중 많은 수량의 구슬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희귀한 사례이며, 가야인들이 신분 위상과 지배 계층의 권위를 장신구를 통해 드러내었음을 실증적으로 말해 준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도 중요하다.

7세기 익산미륵사지에선 무왕시대 많은 구슬이 나왔는데, 사학자들은 당시 구슬은 금의 10배 가량의 값을 치를 정도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금‧은 제품을 주로 다룬 신라, 백제인들과 달리 수정이나 유리구슬을 선호한 가야인들의 생활상과 연관이 깊은 작품으로, 화려함을 추구한 당시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높다. 바꿔말하면 가야의 생활 및 문화수준이 다른 왕국보다 높았다는 점을 짐작케한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의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은 ‘(가야인들은) 구슬을 보배로 삼아 혹은 옷을 꿰어 장식하고 혹은 목에 걸고 귀에 달았지만 금‧은‧비단은 진귀하게 여기지 않았다(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懸頸垂耳, 不以金銀繡爲珍 이영주위재보, 혹이철의위식, 혹이현경수이, 부이김은수위진)’고 적고 있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보물로 지정한다. 앞으로 정부혁신의 하나로 가야를 포함한 삼국시대 고고유물의 가치를 밝히는데 적극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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