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니’ 손댔더니 ‘가스관’이 터졌다… 위기의 메르켈

파리/손진석 특파원 2020. 9. 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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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극물 중독된 ‘푸틴 정적’ 나발니, 독일 데려와 독살시도 밝혀내자 반대 무릅쓰고 추진해온 러·독 천연가스 연결 사업 ‘휘청’
올 1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만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 연합뉴스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러시아 정보기관이 개발한 독극물 노비촉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밝혀낸 건 독일이다. 독일 민간단체가 중태에 빠진 나발니를 베를린에 데려와 입원시켰고, 독일 연방군 연구소가 그의 몸에서 노비촉 성분을 검출해냈다. 독일이 나발니를 둘러싼 의혹을 해소한 주역이지만 이 사건의 불똥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튀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메르켈이 러시아와 손잡고 야심차게 추진해온 천연가스관 건설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압력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르트스트림2’라는 프로젝트명으로 불리는 이 사업은 러시아 서부 나르바에서 출발해 발트해를 지나 독일 북부 그라이프스발트까지 1225㎞에 이르는 해저 가스관을 건설하는 것이다. 2018년 착공해 현재 공사의 90%가 완료됐고, 올 연말 완공되면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독일로 공급된다. 수송량은 연간 550억㎥로, 연간 유럽 천연가스 수요의 4분의 1에 이른다.

메르켈이 이 사업에 공을 들인 이유는 탈(脫)원전을 선택한 독일에서 신재생에너지가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안정적인 대체 에너지원으로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쓰기 위해서다. 또 메르켈은 육상 수송관을 이어붙여 러시아가 체코·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에도 천연가스를 팔 수 있도록 도와 운송 수수료를 챙기겠다는 복안도 있다.

메르켈이 나발니가 노비촉에 중독된 것으로 확인된 지난 2일 러시아를 향해 “살인미수 행위”라고 비난하면서도 “노르트스트림2는 별개”라고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공사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노르트스트림2를 중단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면서 궁지에 몰리고 있다.

6일(현지 시각) 독일 야권에서 우파 성향인 자유민주당과 좌파 성향인 녹색당이 모두 이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서 지난 3일에는 집권당인 기독민주당의 노르베르트 뢰트겐 하원 외교위원장이 “EU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이 사업 중단 요구를 결의해야 한다”고 했다. 기독민주당 대표인 메르켈을 향해 당내 중진이 반기를 든 것이다.

애초에도 이 사업 추진엔 반대가 적지 않았다. 독일 내에서는 “러시아가 가스관을 잠그면 나라가 마비된다”며 러시아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의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높여 안보 불안을 야기한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해 있는 폴란드는 메르켈과 푸틴이 손을 잡는 것에 대해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이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을 연상시킨다”며 맹비난했다.

메르켈은 원래부터 정서적으로 러시아와 가깝다. 어릴 적 동독에서 자랐고, 러시아어에 능통하다. 10대 시절 러시아어 경시대회에 입상해 모스크바를 여행한 적 있다. 푸틴은 소련 정보기관인 KGB 소속으로 1980년대 동독 드레스덴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어 독일어에 능통하다. 둘이 상대방 언어로 깊숙한 대화를 한다. 메르켈의 전기를 쓴 작가 슈테판 코넬리우스는 “둘이 서로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어 오래 산 부부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르트스트림2를 중단하라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지만 메르켈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이 메르켈의 역점 사업이어서 공사를 중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미 공사가 90% 완료된 데다, 이 사업에 영국·네덜란드 등 다른 유럽 국가 기업들도 참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공사를 중단하기도 어렵다. 메르켈로선 난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메르켈뿐 아니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도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슈뢰더는 노르트스트림2 공사를 맡은 법인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고,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 가즈프롬의 고문도 맡고 있다. 독일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슈뢰더가 노르트스트림2나 러시아와 관련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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