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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젠더 갈등 실타래..'기안84' 논란 실마리 안 보인다

유성운 입력 2020. 09. 09. 00:04 수정 2020. 09. 09.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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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복학왕' 여성 비하 표현 등 지적
기안84 '나혼자 산다' 하차요구 한달
비판 공감하지만 퇴출 곤란 시각도
우리 사회가 수용 가능한 표현수위
어디까지로 할지 논의 계기 돼야
웹툰 ‘복학왕’

웹툰작가 기안84를 둘러싼 불길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논란은 8월 초 그가 그린 웹툰 ‘복학왕’의 일부 내용이 성행위와 여성 비하 등을 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시작됐다. 기안84는 사과했지만, 그가 출연하는 MBC ‘나 혼자 산다’의 하차 요구는 한 달째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나 혼자 산다’의 시청자 게시판에 기안84의 하차 요구만큼이나 기안84를 옹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는 것은 이번 논란이 두부 자르듯 간단하게 정리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 달가량 침묵을 지키는 제작진도 마찬가지다. 방송가 관계자는 “현재는 다른 멤버들만 출연하는 임시방편으로 메우고 있지만, 기안84의 하차든 유지든 어느 쪽을 공식화할 경우 한쪽에서 거센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나 관계자들의 시선도 복잡하다.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는 표현의 자유와 젠더 갈등이라는 민감한 ‘뇌관’을 모두 관통하는 이슈여서다.

기안84

◆표현의 자유를 허하라?=문제가 된 부분은 실력 없는 여성 인턴(봉지은)이 회식에서 조개를 까면서 취업에 성공하는 내용이다. ‘여성 혐오’라는 문제 제기와 연재 중단 요구가 쏟아졌다. 일방적이던 흐름이 바뀐 것은 ‘풀하우스’ 등의 작품을 낸 여성 만화가 원수연이 반박하면서다. 그는 기안84를 둘러싼 논란을 ‘검열’이라고 규정하고 한국여성만화가협회가 내놓은 ‘성평등 작품을 위한 주의점’에 대해서도 “유신헌법 긴급조치 9호를 보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웹툰협회도 지난달 24일 작품에 대한 비판 외에 작가 퇴출이나 연재중단 요구는 ‘파시즘’이라는 입장을 냈다.

웹툰계가 ‘영화’와 비교해 가혹한 잣대라는 불만도 나온다. 웹툰자율규제위원회 위원장인 홍난지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콘텐츠스쿨 교수는 “만화계가 과거 군사정부부터 검열과 부당한 대우를 많이 받다 보니 만화가들이 ‘검열’이라는 분위기에 무척 민감하다”며 “한편으론 만화에 대해선 여전히 ‘아동용이니 건전해야 한다’ 같은 차별적 시선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영화는 등급심의위원회 같은 ‘게이트 키핑’이 있지만, 웹툰은 아직 이러한 시스템이 부족한 편”이라며 “휴대전화와 PC로 누구나 접근 가능한 웹툰에 대해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런 논란은 또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작품 비판은 동감하지만, 퇴출이라는 방식은 곤란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작품 내용엔 분명히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서도 “다만 작품에 대해 비판을 해야지 이를 이유로 연재를 중단하라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폭력적 방식”이라고 말했다.

◆리얼리즘인가 여성혐오인가=‘복학왕’은 네이버 웹툰의 대표작 중 하나다. 지잡대·흙수저 등으로 상징되는 우기명이라는 비서울대 남학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가 날 것 그대로 묘사되는 데 대한 호응이 컸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면서도 그간 문화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정서를 대변해서다.

김형기 조선대 건축학부 교수는 한 학회지에서 ‘복학왕’을 톨스토이의 부활과 비교하면서 ‘많은 조사와 경험을 통해 시대의 현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최종오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복학왕’을 접한 뒤 “문화사회학적 차원에서 다뤄보겠다”며 복학왕의 사회학-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라는 연구서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적 루저’의 억울한 시각이 투영되면서 작품 속 일부 여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도 사실이다. 실력이 없는데 ‘반칙’으로 사회 진출에 성공한다거나, 성(性)과 외모를 이용해 지위를 획득하는 식이다. 기안84의 작품을 두곤 이전부터 “젠더 갈등을 일으킨다” “외국인 노동자나 장애인을 어눌하게 말하는 식으로 묘사해 배려가 부족하다”는 등의 지적이 있었다.

정덕현 평론가는 “기안84의 스토리를 ‘여혐’이라고 하는 건 과도하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불편한 내용이 여러 차례 지적됐다”며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풍자는 비하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디시인사이드 기안84 갤러리에서는 “‘82년 김지영’은 되는데 왜 ‘복학왕’의 우기명의 시선은 안 되는 것이냐” 등의 의견도 있다.

이런 가운데 ‘나혼자산다’가 최근 기안84가 출연하지 않는 동안 선보인 스핀오프 성격의 ‘여자들의 은밀한 파티’(여은파)까지 젠더 갈등의 소재로 떠올랐다. 기안84 퇴출 요구와 시청거부 목소리를 높이는 일부 여성 시청층을 달래려 급조했다는 불만이 나온 것이다. 주로 기안84를 옹호하는 측에서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의 종착점은 어디쯤일까.

하재근 평론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표현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활발하게 논의가 진행된다면 되려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다만 집단의 힘으로 누군가를 매장하는 방식은 안 된다”고 조언했다.

홍난지 교수는 “기안84 논란은 통신 기술의 발달로 콘텐트가 물밀듯 쏟아지는 시대에 벌어진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며 “콘텐트를 소비하고 불편했을 때 어떻게 불만을 제기할 것인지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다보니 일단 낙인을 찍는 거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에 대한 교육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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