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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과 김춘추, 밀약을 맺다.

임기환 입력 2020. 09. 1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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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04] 648년 12월 겨울, 김춘추는 당나라로 향하는 배를 타고 있었다. 뱃머리에 부딪치는 파도가 차가운 물보라를 일으켰다. 물끄러미 겨울 바다를 지켜보는 김춘추의 마음은 6년 전 평양을 향하던 때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평양성을 갈 때에는 대야성에서 백제군에게 희생된 딸 고타소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 마음 가득했다면 당나라 장안성으로 향하는 오늘은 신라의 국운이 자신에게 걸려 있다는 책임감이 두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그나마 이번 사신 길에는 홀로 떠났던 평양길과는 달리 아들 문왕이 함께하고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혹 김춘추의 평양 방문에 대해 궁금하시면 본 연재 82회 '642년, 대전환의 해'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란다.

김춘추의 목표는 당과 군사 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즉 당군을 끌여들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해야 비로소 신라의 조야가 편안해지리라 생각했다. 645년 대야성을 빼앗기고 딸이 죽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뒤에도 기세가 오른 백제는 계속 침공해왔다. 648년 3월에도 백제는 신라 서쪽 땅 10여 성을 함락시켰는데, 김유신이 출정하여 겨우 백제군을 물리쳤다.

장안성을 향하는 길에서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내내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김춘추는 당으로 향하기 전에 당 내부 정세에 대해 충분히 파악했다. 당 태종이 645년 원정에서 요동 벌판에서 죽도록 고생만 하고 결국 빈손으로 돌아온 뒤에는 더욱더 고구려 재원정에 집착하고 있다고 하니 그 점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고구려 남쪽에 있는 신라의 지정학적 입지가 당 태종의 관심을 충분히 끌 수 있고 무엇보다 645년 원정 때에 신라군의 고구려 남경 공격이 백제의 공격으로 수포로 돌아갔음을 환기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회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당은 647년부터 소규모 군대를 보내 고구려 후방을 교란하는 전략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규모 원정 준비를 갖추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당 태종은 647년 9월에는 강남 12주에서 큰 배 350척을 건조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648년 6월 군신회의에서 당 태종은 이제 고구려가 곤궁하고 피폐해졌다고 여기고 이듬해(649)에는 30만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648년 9월에는 군량과 기계들을 삼산포, 오호도에 저장해 두도록 명령하였다.

이 과정을 645년 원정 준비 과정과 비교해보자. 즉 644년 7월에 배 400척을 만드는 명을 내리고, 10월에 영주로 군량을 나르고 고대인성에 곡식을 저장하도록 하였으며, 11월에 원정군을 편성하는 조서를 내리고, 645년에 원정에 나섰던 것이다. 두 과정을 비교해보면 당 태종이 649년에 고구려를 원정할 계획을 정해놓고 구체적인 준비를 갖추어가고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게다가 645년 원정을 논의할 때에는 적지 않은 군신들의 반대가 있었는데, 648년 6월 조정에서 논의하는 자리는 물론 그 이후에도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의지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는 사료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7월에 병이 깊어진 방현령(房玄齡)이 마지막으로 힘을 다해 올린 상소가 눈에 띌 뿐이다. 이는 당시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의지가 매우 강력하였기 때문에 군신들이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당 태종이 이듬해에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한 준비 과정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상황에서 648년 윤12월에 신라 김춘추가 당 조정을 방문한 것이다. 아마도 김춘추는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이 임박해지는 시점을 의도적으로 골랐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는 김춘추에 앞서 겨울에 한질허(邯帙許)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당에 조공한 바 있다. 이때 당 태종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문제에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아마도 한질허는 김춘추가 당에 가기에 앞서 당 내부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보낸 사신일 것이다.

태종무열왕비 귀부와 이수(일제강점기).

사실 김춘추는 당시 신라 진덕왕 정권에서 실질적인 1인자였다.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毗曇)의 난을 진압하고, 그 와중에 선덕왕이 죽자 진덕왕을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다. 김춘추는 사신이라기보다는 신라왕을 대신하여 당 태종과 담판을 지을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당 태종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광록경(光祿卿)을 보내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는 등 후례를 베풀었다.

김춘추 역시 서두르지 않았다. 국학(國學)에 가서 제사 의식과 강론을 참관하겠다고 요청하였고, 이를 허락한 당 태종은 자기가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김춘추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중 '진서'는 고구려 원정 이듬해인 646년 3월에 당 태종이 편찬을 명하여 648년에 완성한 서진과 동진의 역사서다. 그런데 '삼국지'를 비롯하여 남북조시대에 편찬된 '위서' '송서' '양서'는 물론 당 태종 정관 10년에 완성된 '주서(周書)'에서도 동이열전에 수록되어 있는 고구려전이 '진서'에는 빠져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아마 고구려 원정 실패 이후 고구려에 대한 적대적 의식이 반영된 결과인 듯싶다. 당 태종이 '진서'를 김춘추에게 준 것은 무엇보다 자신이 깊이 관심을 기울여 새로 편찬한 책이라는 점이 주된 이유겠지만, '진서'를 통해 고구려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은근히 전달하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당 태종이 김춘추를 사사로이 만나 후하게 예우하면서 밀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여 멸망시킨 후 그 땅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 밀약이 맺어졌다. 그 밀약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문무왕이 671년에 당의 장군 설인귀에게 보낸 답서에 언급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살펴보겠다.

당 태종은 김춘추와 맺은 밀약으로 신라군을 동원하면 이번 재원정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 나름 확신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김춘추에 대한 예우가 각별했다. 김춘추에게 정2품의 특진(特進) 관작을 주고, 아들 문왕은 종3품인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또한 김춘추가 귀국할 때 조정의 3품 이상 관리들에게 송별 잔치를 열도록 조칙을 내리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김춘추는 아마 매우 흡족했을 것이다. 당과 군사적인 협약을 맺었다는 외교적 성과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김춘추 자신에게는 이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신라 왕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존재임을 당 태종에게 충분히 인식시켰다는 점이다. 반대로 신라 정계에서는 당 태종의 지지를 받는 인물로서 김춘추 자신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648년 김춘추의 사행길은 신라 사회에 새로운 지각변동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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