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의 시시각각] 추미애식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현상 2020. 9. 1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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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갈 군대 갔는데 웬 시비' 태도
사실이라면 병무 방해 행위일 뿐
반칙 쓰면서 명예까지 챙기려나
이현상 논설위원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에 따르는 의무) 하면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죽음이 흔히 거론된다. 그는 28세 되던 해 한국전쟁이 나자 중국 인민지원군에 자원, 펑더화이 사령관 비서로 일하다 한 달 만에 미군 공습으로 전사했다. 뒤늦게 비보를 들은 마오쩌둥은 한동안 줄담배를 피우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며 마음을 달랬다. 범상치 않은 죽음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지만 약간 다른 이야기도 있다. 그가 대피 명령을 무시하고 계란볶음밥을 요리하다 연기를 피우는 바람에 폭격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실제로 펑더화이는 주석의 아들을 모시다시피 했다. 혹시 사고라도 날까 봐 항상 자신의 옆에 뒀고, 보초 근무 제외는 물론 총도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눈으로 보면 영락없는 ‘민폐’다.

아들의 군 휴가 특혜 의혹에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여권이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치고 있다. 그중 유난히 거슬리는 대목이 있다. 안 가도 될 군대에 갔다는 말이다. 추 장관은 “한쪽 다리를 수술해 제가 국회의원이 아니면 군대에 안 가도 됐을 아이다. 더는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설훈 민주당 의원도 “안 갈 수 있는 군에 갔다는 사실 자체가 상찬(賞讚)거리”라고 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건데 이만 한 일로 왜 문제를 삼느냐는 투다.

사실이라면 상찬거리가 아니라 시빗거리다. 병역 감당이 안 될 몸을 숨기고 입대했다면 ‘병무 방해’ 행위다. 국적이나 가사 사정 같은 면제 사유를 뿌리치고 입대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정치인의 앞날을 생각해 아픈 아들을 군대에 보냈다면 더 큰 문제다. 군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초선 의원 시절 ‘재발성 탈구증’을 가진 아들의 입대를 위해 탄원서까지 제출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체 상태를 제대로 알렸는데도 현역 판정이 났으면 갈 군대를 간 것일 뿐 생색낼 일은 아니다. 더구나 해병대 입대도 아니고 ‘편한 군대’(우상호 민주당 의원의 표현이다!)를 택한 처지 아닌가.

실제로 추 장관의 아들은 군에 폐를 끼쳤다. 무릎 수술을 받은 지 1년 반쯤 지나 입대한 아들은 불과 7개월 만에 무릎 통증을 이유로 병가를 얻어 재수술했다. ‘안 가도 될 군대’를 가는 바람에 동료 병사의 두 배 가까운 휴가를 얻어 동료의 사기를 떨어트렸다. ‘엄마 찬스’ 사달을 일으키며 군에 큰 부담을 안겼다. 군에 가서 아플 수도 있다. 진짜 ‘병역 의무의 명예’를 실천하려 했다면 군 규정에 묵묵히 따르면 된다. 과거 정부의 한 실세 정치인은 아들을 최전방에 보내면서 “아버지가 누구 아니냐고 묻거든 동명이인이라고 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렇다. 생색내는 순간 ‘노블레스’의 빛은 사라진다.

휴가 관련 위법 여부는 더 따져볼 일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사랑(모정)도, 명예(병역 의무)도, 이름(정치적 명성)도 남김없이 다 챙기려는 권력층의 민낯을 또 한 번 본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배신감, 낯설지 않다. 이른바 조국 백서(『검찰개혁과 촛불 시민』)는 조국 일가의 행태를 이렇게 변호한다. “‘원천적 부도덕성’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지했더라도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진보 권력’ 주역들의 의식 수준을 딱 보여주는 고백이 됐다. 추 장관 일가는 ‘오블리주’에 ‘노블레스’의 포장지를 씌우고, 그 안에서 서민들은 알 길 없는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의 연줄을 동원했다. 그러곤 “안 갈 군대를 갔는데, 이 정도가 무슨 문제냐”고 말한다.

박완서 소설 ‘도둑맞은 가난’의 주인공 여공은 동거까지 했던 애인이 실은 서민 체험을 했던 대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절규한다. “맙소사, 이젠 부자들이 가난마저 훔쳐간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외치지 않을까. “맙소사, 이젠 특권층이 군대 고생까지 훔쳐간다”고.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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