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파일명 '추미애'

구혜영 정치부장 입력 2020. 9. 14.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나희덕 시인의 <파일명 서정시> 첫 구절이다. ‘파일명 서정시’는 구동독 정보국이 서정시인 라이너 쿤체의 모든 것을 수집한 자료집 이름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서정시인은 불온한 존재이다. 취임과 동시에 ‘불온한’ 정치 환경과 맞닥뜨린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지금 한국 정치가 <파일명 서정시>를 다시 쓴다면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추미애>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구혜영 정치부장

이 대표는 관리형이 아닌 미래권력이라는 스포트라이트까지 받았다. 코로나 강점기를 뚫고 미래로 나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낡은 과거로뒷걸음질 치고 있다. 고위공직자 다주택 현황은 여야 모두 중산층 이상의 계급 기반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의료파업·종교집회는 엘리트층의 선민의식을 과시하며 공동체 정신을 무너뜨렸다.

이 대표는 교섭단체 대표연설 30분 동안 한국판 뉴딜, 신성장 등 5대 어젠다를 꺼냈다. 스스로 미래권력이라는 지위를 생각했을 테다. 그의 기대와 달리 정치는 과거로 되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대전환의 시대에 과거 방식으로 대응’(미국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하고 있다. 진영·세 대결은 정치권뿐 아니라 시민사회 내부까지 강화됐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공공의료엔 80~90%가 동의하면서도 ‘문재인 정부’라는 단어 하나만 추가하면 응답 비율은 5 대 5로 갈라진다. 절반 정도는 양측 어디에도 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단순한 정치 불신이나 정부 정책을 지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내 편(지지 정당)의 이익과 상처가 정치적 선택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 중요한 정치 과제가 다른 세력에는 혐오가 되는 것.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특혜 의혹은 이 심각한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군대 문제는 역린이다. 지난해 ‘조국 대전’은 다른 역린인 교육을 건드렸다. 교육은 부모 입장에선 자식들을 위한 성공 자본이자 욕망의 대물림 영역이다. 군대 문제는 결이 다르다. 부모 세대에겐 집단적 체험을 끄집어내는 악몽이자, 자식 세대에겐 ‘똑같이 고생해야 하는’ 공정의 영역이다. 여성을 2등 인간으로 취급하는 기제인 만큼 여성 문제이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다. 군대는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다루는’ 상명하복 문화를 체화하는 곳이다. 군대는 또한, 곳곳에서 폭력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클리셰로 통용되고 있다. 군대의 역린이란 이처럼 모두에게 현재진행형 서사이다.

부대 밖에서 휴가 연장 전화를 하고 휴가명령서도 없다. 보좌관이, 혹은 장관 부부가 국방부 민원실로 전화했다는 의혹이 나왔다. 세상천지에 연줄 하나 없는 사람들은 자식이 어느 부대에 있는지 몰라 속이 타들어갈 때쯤에야 국방부 민원실이란 곳을 알게 될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잡아줄 수 있는 손이 있고 없는 것, 군대는 이 지점에서 계급 문제까지 파고든다.

이 엄청난 역린 앞에서 거대 여당은 왜 이렇게 왜소하고 옹졸한가. “병역 미필자는 국민의힘에 더 많다”는 말은 176석이나 차지하고도 비주류를 못 벗어났다는 걸 입증한다. 다음엔 불법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주장한다. 시민들은 특혜 아니냐고 의심하는데 법을 앞세운다. 이는 ‘법을 권력의 빅마우스’로 삼겠다는 기득권적 태도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시대정신이고 정치는 그 가치를 최대한 반영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의 자세 아닌가. 심지어 당직사병의 실명을 거론하며 ‘단독범’ ‘배후세력’을 운운한다. 이 정도면 시민을 상대로 ‘밀리면 안 된다’는 스크럼 정치를 선포했다고 봐야 한다. 사람들은 진지하게 정치에 말을 걸고 있는데, 별 볼 일 없이 근근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마저도 힘겨워하는데 집권여당의 울타리는 가시 돋친 철조망을 겹겹이 두르고 있다. 마치 페스트가 창궐했던 14세기 중세 유럽, <데카메론> 귀족들의 ‘위험한’ 도피처 피에솔레처럼.

6개월 후 이 대표는 얼마나 많은 파일명을 기록할지, 그 파일 안에 어떤 세상을 담을지 모르겠다. 한국판 뉴딜, 신성장 다 좋다. 그러나 당분간 내려놓길 바란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지금은 집권여당 대표가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해야 할 때다. 성난 마음의 뿌리를 돌아봐야 할 때다. 이 대표의 첫 파일명은 <추미애>여야 한다.

구혜영 정치부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