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중앙일보

[서소문 포럼] 소설 쓰시네? 소설 쓰셨다

조강수 입력 2020.09.15. 00:35 수정 2020.09.15. 06:5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송구하다" 추미애 장관 입장문
진상 설명 없이 감정에 호소
독립 수사팀 구성도 철저 외면
조강수 사회에디터

국회에서 “소설 쓰시네”라고 의원들을 힐난하더니(14일 국회에서 사과) 그제는 직접 소설을 쓰셨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내놓은 입장문 얘기다. 당 대표를 지낸 5선 정치인의 관록 대신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미의 마음, 남편에 대한 아내의 심정을 신파스럽게 녹여냈다.

“국민께 정말 송구하다”는 표현이 있으니 대국민 메시지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뭐가 송구한지가 빠졌다. 코로나19 위기로 생활과 심기가 모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별것 아닌 일(아들의 군복무 시절 문제)로 걱정을 끼쳐 송구하다는 게 다다. 군은 아픈 병사를 치료할 준비가 잘 돼 있어서 딱히 절차를 어길 이유가 없었으나 일각에서 병가 연장의 불법을 의심해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고, 사건에 영향을 끼칠까 걱정돼 법무부 장관으로서 인내심을 갖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상황 설명도 재탕 삼탕 옛노래다.

그러다 보니 말미에 "검찰 개혁은 국민의 뜻이자 운명적 책무라서 이를 완수하겠다”는 엉뚱한 다짐이 외려 눈에 띈다. 어디서 본 프레임이긴 하다. 여태까지 추미애표 검찰 개혁이 내보인 목표는 한가지다. 검찰 힘빼기와 ‘배신자 윤석열’에 대한 공적 복수다. 법 기술을 동원한 ‘정권에 불편한 수사 막기’가 검찰 개혁이라면 누가 환영할 것인가.

서소문 포럼 9/15

추미애는 결단이 빠른 정치인이다. 그 나름 기준과 원칙을 갖고 일도양단해왔다고 자타가 공인한다. 물론 판단의 정확성은 별도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찬성이 대표적이다. 그 상황 판단 잘못의 결과에 대해 사죄한 게 광주 삼보일배다. 추미애는 "그 일로 인해 제 다리도 높은 구두를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고 적었다.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드루킹 사건도 따지고 보면 그의 댓글 조작 사건 등 고발 지시가 시발이 됐다. 조국 후임으로 법무부 장관 바통을 이어받은 뒤 눈엣가시가 된 윤석열(검찰총장)을 뒤주 속 사도세자처럼 가두는 과정에서도 신속한 결단력은 빛을 발했다. 검찰 대학살 인사와 수사지휘권 발동의 칼을 동시다발로 휘두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번엔 달랐다. 수사 착수 8개월 만에 낸 입장문에는 알맹이가 빠져있다. "진실의 시간” "검찰은 누구도 의식하지 말고 실체적 진실을 밝히라는 국민의 명령에만 복무해야 할 것”이라는 언급은 공허하다. 정말 그게 진의라면 아들 수사를 객관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외견상 그렇게 보이기라도 할 수 있는 수사팀을 새로 구성한다고 선언했어야 했다.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독립적 수사팀 구성을 스스로 결단했어야 했다.

교육·병역의 부정과 불공정은 대한민국 부모들에게 가장 민감한 이슈다. 촛불 혁명의 발단은 정유라의 이대 입시 비리였다. 장관 아들의 병가 특혜 문제는 그에 못지않다. 이미 서울동부지검 수사팀은 만신창이다. 대검 지휘라인에 있던 반(反)윤석열 성향의 검사장이 동부지검장에, 중요한 참고인 진술을 누락했던 검사가 재투입됨으로써 수사의 염결성은 오염됐다. 정의는 지연됐고 이제 어떤 결과를 진실이라고 내놔도 신뢰받기 어렵다. 추미애가 ‘검언유착’ 의혹 사건에서 사상 두 번째 수사지휘권까지 발동하며 윤석열을 지휘라인에서 배제한 명분은 이 사건에서 빛이 바랬다.

만약 이번에 추미애가 역발상으로 조국 사태 이후 갈등의 대척점에 서 있는 윤석열에게 수사팀 구성을 일임했다면 어땠을까. 사실 검찰총장에겐 독립적 수사권이 부여된 특임검사 임명권이 있다. 이전에 이 정도 사안이면 총장이 결단했다. 지금은 장관 서슬에 눌려 옴짝달싹을 못 하는 형국이다. 장관과 총장이 침묵하는 사이, 이 나라는 의혹만 있고 진상은 드러나지 않는 나라, 그래서 ‘범죄 없는(※정확히는 안 밝히는) 나라’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법무부 수장의 아들이 아니라면 벌써 끝났어야할 수사다. 검찰이 질질 끌어온 것 자체가 그냥 덮고 가기엔 목격자와 관련자 진술이 임계치를 넘었고 기소하기엔 부담스럽기 때문 아닐까. 이 불편한 진실을 추미애만 모르는 건 아닐까.

수사팀 검사들이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장관의 말마따나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지 않는” 용기를 내는 것뿐이다. 당장 "우리 편도 수사하라”는 대통령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낭패한 경우도 있지만 이번 건은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재수사·재조사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김대중 정부 때 법무부 구호가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였다. 검사 각자가 검사다워야 검찰이 바로 선다. 곁불을 쬐지 않아야 나라가 바로 선다.

조강수 사회에디터

포토&TV

    실시간 주요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