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이름♡'로 표기되는 여자 연예인[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0. 9. 1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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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쯤 되면 연예 기사가 아니라 연애 기사 아닐까. 칼럼 작성일 기준(9월8일), 약 두어 시간 동안 별도 검색 없이 포털 연예면 메인에서만 확인한 기사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주영훈♡’ 이윤미, 다이어트한 보람 있네 ‘딸셋맘’ 믿기지 않는 비주얼’” “‘수진아! 그립다’ 김성은, 3년째 잠수”, “‘배용준♡’ 박수진과 여전한 우정” “‘하희라, 붉은 드레스 입고 우윳빛 피부 과시 ‘♡최수종’이 반할 만해’” “‘김원효♡’ 심진화, 인간 복숭아가 따로 없네, 과즙미 팡팡’” “‘현아♡’ 던, 나른함 넘어서 퇴폐미 치명적 섹시함’”

모두 이윤미, 박수진, 하희라, 심진화, 던 등 연예인에 관한 짧은 근황 기사인데, 이들은 모두 하나의 개인이 아닌 각각 ‘애인 이름♡’ 아무개로 표기된다. 당연히 단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은 아니다. 조금만 시간 범위를 확장해 검색해보면 다음과 같은 제목들도 만날 수 있다.

최근 이혜성 전 KBS 아나운서의 MBC <라디오스타> 출연은 “‘전현무♡’ 이혜성, KBS 퇴사→라스 출격’”으로, KBS <한 번 다녀왔습니다> 출연 중인 배우 이민정의 활약을 두고는 “‘이병헌♡’ 이민정, 39세가 안 믿기는 미모, 비주얼, 연기력 전성기” 같은 제목으로 소개한다.

그래픽 | 이아름 기자

연애나 부부 사이에 관한 기사라면 모를까, 당대의 스타 배우이자 최근 tvN <청춘기록>에도 출연 중인 하희라의 최근 사진에 대해 ‘최수종의 ♡’라는 수식이 굳이 왜 필요할까.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자신의 삶을 써나가는 주체적인 개인들을 굳이 왜 누군가의 애인이나 반려자로 수식하는 걸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 연애와 사랑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한 인간의 전부가 된 것일까.

당장 떠올릴 수 있는 답은 제목을 통한 어뷰징이다. 위 기사는 온전히 하희라, 박수진, 이민정 개인에 대한 소식이지만 최수종, 배용준, 이병헌을 검색해도 노출되도록 설계됐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명백한 꼼수지만 팩트가 틀린 제목은 아니다(♡를 사랑이라는 의미로만 해석하면 확신할 수 없지만). 다만 불필요한 정보다. 토니 안의 예능 출연 소식에 대해 ‘이옥진 아들’ 토니라고 수식하지 않는 건,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해당 소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어떠한 정보적 가치도 더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직관적 이해를 방해한다.

기사 내용을 고려한다면 위 제목들은 “김성은, 과거 <테이스티 로드> 함께했던 박수진과 여전한 우정 과시”, “배우 이민정, 영화와 트렌디 드라마 벗어나 주말 가족극에서 새로운 전성기” 같은 제목으로 수정하는 편이 더 적절하고 직관적이다.

하지만 실제 제목을 보면 이들이 애인이나 반려자와 마치 무언가를 함께하는 일에 관한 소식처럼 오해하기 십상이다. ♡를 둘의 이름 사이에 의도적으로 배치할 때 특히 그러하다. 이것이 인터넷 언론 어뷰징의 본질이다.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면 독자가 오해 혹은 착각할 법한 제목을 달아 게재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것.

물론 누군가를 다른 누군가의 ♡로 수식하는 것이 어뷰징을 위한 온갖 자극적 언어들, 가령 과거 하나의 밈(meme)처럼 소비되기도 했던 ‘숨 막히는 뒤태’ 같은 수식만큼 천박하진 않다. 하지만 저 ♡가 사용되는 맥락을 보면 독자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 경우에조차 해롭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기사 속 대상을 누군가의 ♡로 수식한 기사의 상당수는 연예인의 인스타그램 속 셀카를 공개하는 수준이다. 물론 연예 매체는 십수년 전부터 연예인의 싸이월드 내용을 생중계하듯 기사를 써왔다. 관음의 대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옮겨온 지도 오래다. 보도할 가치가 없는 연예인의 사적 순간들을, 그것도 팔로잉만 하면 굳이 매체를 거치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정보를 포털에 팔아 유지되는 이 기괴한 시장에서 기사 제목의 ♡는 마치 매체 특유의 관점이나 해석이라도 되는 양 추가된다.

앞서 인용한 기사에서 하희라가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사진에 대해 매체는 ‘♡최수종’이 반할 만하다고 첨언한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만에 복귀하는 프로 연기자로서 본인의 현재 모습을 대중에게 자신 있게 드러내는 일이 남편을 매혹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가수 별이 민낯을 드러낸 셀카 관련 기사에는 “별, 민낯에도 무결점 피부 ‘♡하하’가 왜 반했는지 알겠어” 같은 제목이 붙는다.

이런 제목에서 한 연예인의 자기표현은 남편을 위한 아내의 매력 발산 정도로 축소된다.

여러 언론 매체는 여성 연예인을 ‘남편·애인 이름♡’ 아무개로 표기한다. 하희라 같은 당대의 배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 ‘하트 어뷰징’은 해당 여성 연예인의 존재나 정체성을 지운다는 점에서 무례하다. 대상을 교묘하게 왜곡하기도 한다. 사진은 구글 이미지 검색(위 사진)과 네이버·다음의 기사 검색에 나온 ‘하트 어뷰징’ 사례.

무례한 제목이다. 연애나 결혼이 어느 정도 독점적 관계일 수 있다는 것이, 누군가의 대표적 정체성을 다른 누구의 연인으로 규정해도 된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반대로 최수종이나 하하가 미모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리라 평하는 것도 그들의 관계에 대한 평가로서 무례하다.

연예인의 SNS 내용으로 쉽고 빠르게 기사는 써야겠고, 베끼는 와중에 차별화된 제목으로 클릭 유도 경쟁에서는 승리해야겠고, 사진 관련해 우윳빛이니, 과즙미니, 딸 셋 있는 엄마 같지 않다느니 ‘얼평’은 해야겠고, 그 ‘얼평’의 알리바이를 위해 그들의 애인이나 반려자 이름을 끌어들이는 온갖 부조리한 동기가 ♡의 남발로 이어진 셈이다.

대중이 ‘기레기’라 폄하하고 비웃는 중에도 여전히 매체의 영향력은 행사된다. 최근 1년 사이 급속히 늘어난 하트 어뷰징이 보여주는 것은, 어뷰징의 진정한 해악은 자극적인 어휘나 독자 낚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관점의 교묘한 왜곡에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저 수많은 ♡가 거짓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수많은 정체성 중 하나를 과대 표하는 것만으로도 그 개인의 행동에 대한 해석은 왜곡된다. 혹은 왜곡하고 싶은 이들을 유도한다.

이혜성 전 아나운서가 인스타그램에 요리 사진을 올렸을 때 정말 수많은 매체가 이를 아무 근거나 취재도 없이 “‘전현무♡’ 이혜성의 신부수업”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도했고 당연히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 최근 이 전 아나운서가 <라디오스타>에 나와 이를 해명하고, 전현무의 명성을 이용한다는 악플에 대한 상처를 고백했지만 그 관련 기사들에서마저 그는 여전히 “‘전현무♡’ 이혜성”으로 표기된다. 악플의 문제를 전하는 기사들이 바로 그 악플의 지배적 관점을 그대로 사용하는 뻔뻔한 모습은 그래서 실패한 풍자화처럼 보인다.

연예 매체가 연예계와 대중 사이에서 더는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희화화된 지 오래지만, 그들의 꼼수는 여전히 세상을 조금은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심지어 ♡의 형상으로.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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