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경향신문]
우리 앞으로 회색코뿔소가 달려오고 있는 것일까. 회색코뿔소는 사회가 이미 인지하고 발생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으며, 일단 발생하면 파급력도 크지만 쉽게 간과하는 위험을 지칭한다. 코뿔소는 멀리서도 눈에 잘 띄며 진동만으로도 움직임을 느낄 수 있지만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대처 방법을 알지 못해 일부러 무시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전 세계가 부채의 늪에 점점 더 깊게 빠져들고 있는 현 상황에 적절한 표현이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글로벌 부채 규모가 올해 1분기 기준으로 258조달러로 증가했다. 이는 전 세계 GDP 대비 331%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특히 미국, 영국, 유로존과 일본과 같은 선진국들의 경우에는 392%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자료를 토대로 이를 부문별로 나누어보면, 위의 선진국들은 가계, 비금융기업, 정부 부문의 GDP 대비 평균부채비율이 72.1%, 92.1%, 112.1%이다. 한국은 해당 비율이 각각 95.9%, 105.1%, 42.7% 순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가계부채와 정부부채이다.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에 가계부채비율이 98.6%까지 올랐다가 고통스러운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을 통해 줄어든 것이다. 영국도 94.9%에서 떨어진 것이다.
반면에 정부부채는 금융위기 직전 미국과 영국 각각 60.7%, 44.1%에서 크게 올라갔다. 아데어 터너(Adair Turner)가 얘기하듯이, 부채는 일단 과도하게 쌓이면 없애기 어렵다. 글로벌 위기 이후 각국이 한 일은 민간부채를 정부부채로, 선진국부채를 개도국으로 이전시켜 놓은 것이다. 분명 재정적자는 민간부문의 부채 감축에 따른 경기침체 영향을 상쇄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예컨대, 일본기업이 부채를 줄이는 와중에 정부가 균형재정에 집착했더라면 일본은 아마 20년간의 저성장이 아니라 대규모 경기침체를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금융위기 직전 가계부채비율이 69.5%, 정부부채비율이 21.5%였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디레버리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연, 증가했으며, 그나마 정부부문으로 이전되지도 않았다.
금융위기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위기의 원인이 있다. 바로 신용팽창-자산가격 사이클이다. 호황과 호황 붕괴에 이은 경기침체나 위기는 경기순응적인 신용공급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급이 비탄력적인 기존 부동산에 대한 대출은 신용공급, 신용수요 그리고 자산가격 간에 자기강화적인 거품을 만들어낸다.
BIS가 측정, 발표하는 지표 중에 신용갭(Credit to GDP gap)이라는 게 있다. 신용갭은 가계 및 기업신용을 합한 민간신용의 GDP 대비 비율이 장기 추세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보여주며, 신용위험의 정도를 보여주고 경기대응 완충자본의 지표로 이용된다. 신용갭이 2%포인트 미만이면 보통단계, 2~10%포인트이면 주의단계, 10%포인트를 넘어서면 경보단계로 구분한다. 2019년 말 기준 한국의 신용갭은 7.0%포인트로 이미 주의단계에 진입했다. 이대로라면 올해 안에 경보단계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가계부문의 경우는 이미 임계치를 넘었다.
가계의 과잉부채가 부실화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우리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서 이미 목도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기왕에 존재하는 경기대응적 자본규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하여 과도한 신용팽창을 억제하는 한편, 중기적으로는 가계부채를 축소해 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야기되는 경기침체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재정을 통한 대응이 필요하다. 정부부채? 궁극적으로 정부의 통화창출이 민간의 신용창출보다 덜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한 얘기다.
정중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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