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곁엔 아무도 없었다.. 초등생 '라면 형제'의 비극

오주환 2020. 9. 1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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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화재 당시 지인 만나고 있었다"
'라면형제 비극'이 벌어진 인천시 미추홀구 용현동 빌라 내부가 시커멓게 탔다. 연합뉴스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라면을 끓이다 집에 불이나 중태에 빠진 인천의 소년 형제가 그동안 변변히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방치돼온 것으로 드러났다. 무책임한 엄마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뚫린 학교·아동돌봄기관의 공백, 담당 기관조차 알지 못한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라면 형제의 비극’이 잉태된 것이다.

17일 소방당국에 따르면 초등학교 4학년 A군(10)과 2학년 B군(8) 형제는 지난 14일 엄마 C씨(30)가 집을 비운 새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실수로 불을 냈다. 오전 11시16분 “살려달라”는 A군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당국이 10여분만에 불을 껐지만 형제는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4층 빌라의 2층 집 33㎡(10평)은 모두 시커멓게 탔다.

A군은 전신의 40%에 큰 화상을, B군은 다리에 1도 화상을 입었다. 불구덩이 속에서 형이 동생을 감싸 안으면서 동생 대신 상반신에 큰 화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화재가 난 그날 형제가 다니는 학교는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비대면 수업을 시행했다. 평소처럼 등교했다면 형제가 학교 급식을 기다렸을 터였다. 때문에 라면 형제의 비극은 코로나발(發) 돌봄 공백이 낳은 사례 정도로만 기억됐다.

하지만 엄마가 수년 전부터 형제를 방임해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사건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됐다. 인천 미추홀경찰서에 따르면 엄마 C씨는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돼 지난달 검찰에 송치됐다. 형제를 신체적으로 학대하고 방임한 혐의였다. C씨는 화재 전날부터 당일까지도 아이들만 집에 두고 나왔다. 그는 16일 경찰 면담에서 “화재 당시 지인을 만나고 있었다”고 말했다.

C씨의 방임은 수년 전부터 이어졌다. 이웃주민들은 2018년 9월부터 세 차례나 관계당국에 “아이들이 방치되고 있다”고 신고했다고 한다. C씨는 주의력 결핍 과다행동 장애(ADHD)를 앓는 큰아들을 “말을 듣지 않는다”며 때리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첫 신고 이후 아동지원기관인 인천아동보호전문기관과 미추홀구 ‘드림스타트’가 C씨를 상담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지난해 9월 24일 두 번째 신고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5월 12일 세 번째 신고가 접수되자 아동보호전문기관은 결국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이 C씨를 아동보호사건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고 검찰이 아동보호사건으로 청구하면서 C씨 건은 인천가정법원에 회부됐다.

인천가정법원은 끝내 지난달 27일 C씨에게 1주일에 한 번씩 6개월 동안 전문기관 상담, 두 아들은 12개월 동안 상담을 받으라는 처분을 내렸다. 그가 우울증과 불안증세 등 정신병 병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 재확산으로 끝내 첫 상담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아동돌봄기관에서도 코로나 공백이 뚫린 것이다.

C씨는 초등학교에 돌봄신청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형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지난 8월 26일 가정통신문을 보내 수도권 지역 전면 원격수업 전환에 따라 해당기간 동안 돌봄이 꼭 필요한 가정의 학생을 대상으로 긴급돌봄서비스 제공할 계획이라고 안내했었다.

C씨는 이전에도 형제를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 보육시설에 단 한차례도 보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오랫동안 방치된 아이들은 편의점에서 아동급식카드로 우유와 과자를 사먹으며 끼니를 해결했다. 주로 저녁에 형과 동생 단둘이 편의점에 들러 항상 1만원 이상씩 먹을거리를 사갔다고 한다. 아동급식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품목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데 익숙했던 셈이다.

인천시와 관할구가 복지사각지대를 놓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A군 형제는 아버지 없이 엄마와 셋이 사는 기초생활수급 가정이다. 매달 수급비, 주거지원비 등 160만원가량을 받았으며 인천도시공사에서 공급하는 보증금 260만원짜리 전세 공공임대주택(빌라)에서 지내왔다. 대표적 복지 취약계층인 한부모 가정인 셈이지만 돌봄 복지에서 소외됐다.

인천시와 인천시교육청은 뒤늦게 돌봄시설 이용현황 전수조사에 나섰다. 시는 우선 각 군·구와 함께 지역아동센터 등 돌봄 시설 이용 얼마나 되는지, 위기상황에 처한 가정과 취약계층 등 돌봄 시설 보호가 필요한데도 이용하지 않는 학생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조사할 예정이다.

초등생 형제가 라면을 끓여 먹다 화재가 발생한 인천시 미추홀구 한 빌라 주변 컵라면 용기가 물웅덩이에 잠겨있다. 연합뉴스

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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