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릉이 몰고 찾아온 주치의 "코로나 이후 왕진 신청 늘어"

석진희 2020. 9. 19. 11: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토요판] 커버스토리
'마을 주치의' 추혜인
요양병원 면회 금지되고
대학병원 입원 어려워지자
"집에서 환자 돌보고 싶은데
방문진료 와주시면 좋겠어요"
동네 주치의로 살면 좋은 점
"신뢰 바탕 피드백 많이 받아
오진 줄일 수 있는 기회는 행운"
서울 은평구 ‘마을 주치의’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이 지난 14일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어머, 콜레스테롤 그렇게 높으면서 여기(치킨집)서 만나면 어떡해요!” “아이고~ 우리 주치의 선생님, 요즘 산에 잘 안 오시던데 좀 걸으세요~.”

퇴근길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느 의사와 환자의 대화다. 의사가 진료실 밖에서 ‘칼로리 파티’ 하는 환자한테 잔소리를 하면, 환자는 도리어 의사 건강을 걱정하면서 여유롭게 잔소리 공격을 피해간다. 의사와 환자의 대화가 이렇게 장난스럽고 포근하다니.

이 의사는 추혜인(43) 살림의원 원장이다. 2012년 마을 중심 의료를 지향하며 서울시 은평구에 ‘비영리 의료복지 협동조합’ 살림의원을 설립해 오늘날까지 환자를 돌보고 있다. 조합원 348명으로 시작한 살림의원은 8년이 지난 지금, 조합원 3200명이 넘는 협동조합으로 성장했다.

살림의원 안내 데스크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마을 주치의, 살림의원”. 살림의원은 설립 때부터 ‘마을 주치의’, 동네 주치의를 내걸고 지역 주민의 건강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일차 보건의료를 지향해왔다.

추 원장을 포함해 가정의학과 전문의 2명, 산부인과 전문의 1명, 정신과 전문의 1명이 진료팀을 이루고 있는 살림의원은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보건복지부 ‘일차의료 왕진 수가 시범사업’에 참여하기로 신청한 전국 348개 의원 중 하나다. 이전까지 왕진은 수가가 아예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의사가 안 해도 되는 진료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살림의원은 설립 첫해부터 왕진을 해왔다.

왕진 시범사업에 참여한 뒤, 그의 진료 일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환자가 요청하면 평소 퇴근길에라도 들르지만, 이제 매주 수요일은 아예 왕진만 한다. 추 원장도 ‘왕진 받을 권리’가 보장된 쿠바 일차의료 시스템을 직접 보고 돌아와 살림의원에 적용하고 있다. 그에게 보건 위기에 강한 쿠바 의료의 힘과 한계를 물었다. 또 ‘찾아가는 의사’가 왜 필요한지, 흔하지 않은 ‘동네 주치의’의 삶은 어떤지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14일 오후 살림의원(서울 은평구 서오릉로 149)에서 진행됐다. 진료를 마친 환자들이 인터뷰하는 주치의에게 다가오더니, 치어리더 ‘응원 수술’처럼 신나게 손을 흔들고 돌아갔다.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이 따릉이(서울 공공자전거) 바구니에 왕진 가방을 담고 방문진료 가는 길. 추혜인 제공

________________ 주치의가 아니면 듣기 어려운 환자 이야기

―환자분들이랑 되게 친하신가 봐요!

“네, 다들 오래 뵌 분들이시고, 또 같은 동네 사니까요. 길거리에서도 마주치고, 코로나19 전에는 목욕탕, 술집 같은 데서도 어찌나 자주 뵀는지…(방긋).”

―동네 주치의는 한국에선 굉장히 낯설어요. 8년간 동네 주치의로 살면서 어떤 점을 배우셨어요?

“환자로부터 진료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기회가 많았어요. 이게 의사로선 굉장한 행운이에요. 피드백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오진을 발견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거든요. 환자는 의사에 대한 신뢰가 있을수록 약 부작용이나 불편한 이야기를 잘 해주세요. 평생 주치의니까. 그런데 환자에게도 그게 편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부정적 피드백이잖아요. 그러니까 의사와 신뢰가 없는 경우, 마음 편하게 병원을 옮겨버리시는 거죠. 의사들은 부정적 피드백을 듣는 훈련이 잘 안되어 있기 쉽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왕진 시범사업’에 참여한 9개월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어요?

“고령이거나 와병, 장애가 있는 분들은 병원까지 오시기가 정말 어려워요. 왕진이 제도화되니까 이전보다 신청을 더 편하게 해주세요. 올해는 한달에 20~30건씩 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한동안 적게 간 적도 있고요.”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이 고령 환자를 찾아가 방문진료 하는 모습. 추혜인 제공
추혜인 원장의 왕진 가방. 청진기, 설압자(혀를 누르는 데 쓰는 의료기구), 주사기, 소독약, 드레싱 재료, 혈액검사 튜브, 혈당계, 헤드랜턴 등이 들어 있다. 추혜인 제공

ㅡ왕진은 혼자서 가시나요?

“저 혼자 갈 때가 가장 많지만 간호사, 치과의사, 도시락 배달 자원봉사자, 사회복지사, 주민센터 직원 등과 같이 갈 때도 있어요. 환자분이 허락하시면요.”

ㅡ주민들과 왕진을 함께 다닐 때도 있네요.

“그렇죠. 몸이 불편한데 진료를 못 받고 계신 분들을 동네 의사가 다 알 수는 없어요. 주민들이 계셔서, 먼저 발견하고 저희한테 알려주실 때도 있지요.”

ㅡ왕진 받는 환자가 약은 어떻게 구하는지 궁금해요. 병원까지 올 수 없을 만큼 몸이 불편한데, 당연히 약국 가기도 어렵잖아요.

“제가 방문 진료한 환자 중에 혼자 사시는 분은 없었지만, 보호자가 환자를 한순간도 떠날 수 없는 경우는 있었어요. 그 왕진은 한 자원봉사자와 함께 갔는데요, 그분이 다니시는 길에 약국을 들를 수 있다면서 선뜻 약을 배달해주셨어요. 주민들과 함께 진료하면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리곤 해요.”

추 원장은 최근 살림의원과 ‘9년차 동네 주치의’의 삶을 담아낸 에세이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심플라이프)을 펴내기도 했다. 병을 두고 의사와 환자가 시간에 쫓기지 않고 대화하는 병원, 약과 기계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치료하는 병원, 성폭력 피해자와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찾아오는 동네 병원이 되기까지 여정을 처음 책으로 묶은 것이다.

심플라이프 제공

―코로나19 영향은 어땠나요?

“거리두기가 중요하니까 왕진 횟수는 줄였지만, 신청은 더 늘더라구요. 요양병원 면회 금지되고, 대학병원 안 받아주고…. 보호자들이 왕진 와주시면 환자를 집으로 모시겠다고 많이 물어오셨어요. 병원 근처에 사시는 경우 전화 진료도 많이들 문의하셨어요.”

―전화 진료는 의료계가 반대하는 비대면(원격) 진료 아닌가요?

“저희도 원격 진료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에요. 그런데 전화 진료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봐요. 만성질환이 있으신 분은 전화 진료도 큰 도움이 될 때가 많아요. 지속되는 증상과 먹던 약이 있잖아요. 환자와 의사가 서로를 신뢰하고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전화 진료는 그 연결을 강화하는 수단이 돼요. 영국, 네덜란드, 스웨덴같이 주치의 제도가 잘 시행되고 있는 국가들에서도 주치의 전화 상담은 기본으로 해요. 원격 진료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기계, 플랫폼을 쓰느냐가 아니라고 봐요. 환자와 의사의 연결을 약화시키지 않는 방향이 최우선으로 고려되면 좋겠어요.”

________________ 쿠바에서 본 ‘소아과-산부인과-정신과’ 팀플레이

―살림의원에는 흔히 일차의료 담당이라고 생각하는 가정의학과뿐만 아니라 산부인과, 정신과 전문의가 계세요.

“2018년 안식월에 쿠바엘 갔었어요. ‘가족주치의 제도’가 확실하게 정착한 곳이 쿠바잖아요. 주치의 진료소(콘술토리오)를 직접 찾아가서 참관하는 동안 인상적인 시스템이 눈에 들어왔어요. 보통 쿠바 전문의들은 진료소보다 한 단계 높은 의료시설(폴리클리니코)에서부터 일하는데, 특이하게도 소아과, 산부인과, 정신과만은 전문의가 팀을 이뤄서 주치의 진료소를 서포트하는 거예요. 이 시스템에는 의료적 필요가 높은 아이, 여성, 정신적으로 취약한 사람들 가까이에 언제나 전문의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 깔린 거죠. 원래 살림의원은 가정의학과 전문의 2명만 있었는데요, 쿠바에서 돌아와 산부인과, 정신과 전문의들과 함께하게 됐어요.”

―어떤 효과가 있던가요?

“저 같은 가정의학 전문의가 주로 진료하는 소아과의 경우, 쿠바 가족주치의처럼 아이 성장 과정과 특징을 다 기록해둬요. 한국은 백신 접종 외에는 의료 기록이 개인별로 정리되지 않아요. 의료기관별로 흩어져 있고 공유되지 않기 때문에 건강 정보가 통합되기 어려운 구조예요. 만약 아이가 다른 병원에서 진료받는 일이 생기면, 치료 연속성 차원에서 후속 진료에 도움이 될 만한 저희만의 기록을 보호자와 의료기관에 공유해드려요. 깜짝 놀라시죠. 이런 건 처음 받아본다고.”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이 쿠바 가족주치의 알레한드로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쿠바에서 지켜본 공공의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한국 ‘마을 주치의’가 보기에, 쿠바 의료체계의 한계는요?

“의사들이 노동강도에 비해 급여가 낮다 보니(월 10만원) ‘투잡’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한번은 배를 타러 간 적이 있는데 배 운전자가 닥터래요. 의사로서 자긍심과 별개로, 현실적인 어려움이 느껴졌어요. 진료에만 집중할 수 없다는 뜻도 되니까요. 또, 제가 갔던 진료소에는 ‘무상 의료지만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든다’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어요. 진료비가 공짜니까 진료 요구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죠.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도 있어 보여요. 그래도 쿠바에선 환자와 의사의 만남이 일상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한 진료소 주치의와 길을 걷는데, 몇 걸음을 걷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주민들이 자꾸 와서 말을 걸어요. 의사는 멈춰 서서 듣고, 필요한 정보를 주고요.”

―환자가 의사를 믿으니까 그럴 수 있겠지요? 언제든지 주치의가 ‘나’를 도와줄 거라는 신뢰가 있겠고, 그 신뢰는 오랫동안 반복된 경험으로 생겼을 테고요. 진료할 때 ‘신뢰’는 어떤 힘을 발휘할까요?

“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환자에게 안심을 줄 수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의료비 절감이요. 예컨대, 감염성 홍반증이라는 게 있어요. 증상은 안 나타나고 관절염만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요, 보통 류머티즘이라고 생각하지만 바이러스 반응으로 인한 관절염일 수 있거든요. 증상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됐다면 검사하지 않고 기다릴 수도 있어요. 그러다가 증상이 없어지기도 하고. 신뢰가 있으면 불필요한 검사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의료비를 줄일 수 있죠. 신뢰하는 의사라면, 환자도 기다림이 덜 불안하시고요.”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채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