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구글 AI에게 물었다.."유리는 고체인가,액체인가"

서동준 기자 2020. 9. 1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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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기원전 수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에도 등장한 유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물질이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너무나 이상한 물질이다. 고체와 액체의 특성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창에 사용되는 유리는 단단하다. 크게 휘지도 않고, 빛 외의 물질에는 잘 반응하지도, 통과시키지도 않는다. 당연히 고체 같다. 하지만 현미경으로 본 유리의 내부 구조는 심히 액체스럽다. 입자들이 마구잡이로 배열돼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물질에서 고체는 단단하고 액체는 그렇지 않은 이유는 입자 배열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체를 이루는 입자들의 배열 공간적으로 반복된 패턴을 갖는다. 예를 들어 꽁꽁 언 얼음의 물 분자(H2O)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육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를 결정(crystal)이라고 한다. 입자들이 이런 규칙적인 배열을 이루고 있으면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없고, 이는 곧 물질의 형태가 잘 변하지 않는 고체의 물리적 특성으로 나타난다.

반면 액체는 이런 반복된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다. 입자들이 무질서하게 퍼져있다. 그러다 보니 압력이나 열 등을 가하면 입자들이 쉽게 밀려난다. 이는 곧 형태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액체의 물리적 특성으로 발현된다.

고체와 액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리의 입자들은 액체와 같이 무질서하게 퍼져있다. 이론대로라면 유리의 형태는 물과 같이 그릇에 담는 대로 변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유리 입자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특징은 수십 년간 과학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과학자들은 유리의 특이한 구조에 유리 상태(glass state)라는 이름을 붙였고, 유리를 ‘비결정질(또는 무정형) 고체’라는 특별한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비결정질 고체에는 우리가 먹는 엿도 포함돼 있다. 

유리 입자 움직임 들여다 본 인공지능

유리는 고체 상태일때도 그 내부 입자 배열은 액체와 닮아 있어 ‘비결정질 고체’라는 특별한 카테고리로 분류돼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비결정질 상태인데도 입자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유리는 기본적으로 용융된 액체 상태의 유리를 특정 온도에서 굳혀서 만든다. 이때 입자 배열은 그대로이면서도 입자의 이동 속도는 급격하게 느려져 결과적으로 점도가 1조 배가량 증가한다. 마치 무질서한 액체 상태가 제자리에서 급속 냉동된 것처럼 보여, 이를 화학적으로는 과냉각 상태라고도 한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여기까지다. 왜 입자 운동이 느려지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197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은 “고체 이론에서 가장 깊고 흥미로운 미해결 문제는 유리의 성질과 전이에 대한 이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인공지능(AI)이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도전장을 던졌다. 2016년 바둑 AI ‘알파고’를 개발해 전 세계에 ‘알파고 쇼크’를 일으키며 인공지능 시대를 연 구글 딥마인드가 유리의 비밀을 풀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다. 딥마인드는 용융된 유리가 고체로 굳어질 때 입자 수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AI로 분석한 연구 결과를 물리학 분야 국제학술지 ‘네이처 피직스’ 4월호에 발표했다. doi: 10.1038/s41567-020-0842-8

어떤 미세한 변화가 유리를 과냉각 상태로 만드는지 알기 위해서는 입자 수준에서 들여다봐야 한다. 물질의 입자 구조가 곧 전체 특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유리 입자가 주변 입자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로 인해 입자들의 위치가 어떻게 바뀌는지 알아야 전체 특성이 변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연구팀은 유리 입자의 단거리 반발력(short-range repulsive potential), 즉 입자 간에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방지하는 특성을 근거로 시간과 온도에 따른 유리 입자의 운동을 분석하고 예측했다. 분석에는 그래프 인공신경망(GNN·Graph Neural Networks)이 쓰였다. 

과학동아DB

GNN, 나와 내 주변의 관계 분석

GNN은 여러 인공신경망 중에서도 관계를 분석하는 데 가장 적합한 알고리즘으로 꼽힌다. 이미지를 픽셀 단위로 분석하는 합성곱 신경망(CNN·Convolutional Neural Networks)이나 문자나 음성 데이터를 분석하는 순환 신경망(RNN·Recurrent Neural Networks)과 달리, GNN에 입력하는 데이터는 그래프이기 때문이다.

그래프는 여러 개의 점이 있고, 그 점들을 잇는 선으로 이뤄진 형태다. 그래프를 데이터 관점에서 본다면 각 점은 초기 입력 데이터이고, 선은 그 입력 데이터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 2차 데이터다. 어떤 점끼리 이어져 있는지, 또 점끼리 간격은 얼마나 좁은지를 통해 점들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관계 또는 상호작용이 중요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미디어의 영향, 바이러스의 확산 등을 분석할 때 그래프 데이터를 이용한다.

딥마인드 연구팀은 “하나의 유리 입자는 바로 그 주변 입자와 단거리 반발력을 주고받기 때문에 데이터를 그래프로 구축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며 “그래프상에서 점은 유리 입자의 3차원 위치를, 선은 입자 간의 상호작용을 나타내며, 입자 간의 상대적 거리에 맞게 선의 길이를 정해 그래프 데이터를 생성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4096개의 입자로 구성된 가상의 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양한 온도와 압력 조건에서 입자들이 몇 개의 주변 입자와 상호작용하는지, 또 입자들의 위치는 어떻게 변하는지 시뮬레이션한 결과를 연구팀이 개발한 GNN에 학습시켰다.

그 결과, 연구팀의 GNN은 유리 입자가 배열된 이미지 한 장만 보고도 그다음 입자들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측 능력은 현존하는 가장 발전한 기계학습 예측 방법으로 알려진 미국 펜실베니아대 연구팀의 알고리즘보다 463배다.
 

 

무질서한 입자들 사이에 생긴 질서

연구팀은 단순히 유리 입자의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알고리즘이 그렇게 예측하는 핵심 원리를 알아내고자 했다. 사람이 데이터 입력으로 알고리즘을 학습시켰지만, 그래서 알고리즘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결과를 내놓는지는 다시 사람이 알아내야 할 몫이다. 

연구팀이 알고리즘의 경향을 분석한 결과, 액체 상태인 유리의 온도가 낮아질수록 입자들은 더 많은 주변 입자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액체 상태에서는 하나의 입자가 주변 입자 2~3개와 상호작용을 하지만, 고체로 변하기 직전 온도가 되자 5개의 입자와 상호작용을 했다. 

상호작용하는 입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구조상 질서가 생긴다는 뜻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액체에서 고체로 상전이가 이뤄질 때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딥마인드의 입자물리학자 토마스 케크 연구원은 “온도가 낮아져도 우리 눈에 보이는 유리의 겉모습은 똑같지만, 그 안의 유리 입자들은 점점 더 많은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가 유리 구조의 비밀을 완벽히 파헤친 것은 아니지만, GNN이 유리의 비밀을 푸는 데 활로를 뚫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2016년부터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등 7개 유럽 연구기관과 시카고대 등 5개 미국 대학 소속 과학자들은 유리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무질서한 입자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비단 유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생물체 내 고분자 물질이나 다양한 무질서한 소재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첫걸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큰 재단 중 하나인 미국 사이먼스 재단이 이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이들이 AI와 함께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기대해보자. 

※관련기사

과학동아 9월호, 유리는 고체, 액체? 구글 딥마인드의 답은

[서동준 기자 bi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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