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문 대통령은 끝내 '라면 형제'의 비명을 못 들었다

이하경 입력 2020. 9. 21. 00:47 수정 2020. 9. 21.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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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에 숨어 부족전쟁..3류 정치
민생 몰락 속 추미애 아들 타령만
문재인·김종인? 삼호어묵이 정답!
해결의 열쇠는 고통의 현장에 있다
이하경 주필

인천 ‘라면 형제’의 비극은 코로나 역병(疫病)이 할퀸 아픈 상처다. 10살, 8살 초등학생 형제는 14일 기초생활수급자인 엄마가 나가자 빌라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려다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코로나가 확산돼 등교하지 않는 형제는 온종일 굶은 날도 있었다.

역병이 창궐하고 민생이 무너지는데 21대 국회의 첫 정기국회는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의 3년 전 ‘황제휴가’에만 매달렸다. “제발 국정을 논의하자”는 정세균 총리의 호소는 묵살됐다. 나흘(14~17일)간의 대정부 질문은 ‘추미애 전쟁’이었다. 박성준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추 장관 아들이) 안중근 의사의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는 망언으로 분노지수를 높였다.

안 의사 후손들이 “안 의사가 묘에서 벌떡 일어나실 일”이라고 반발했다. 국민의힘은 실세 장관의 오만과 위선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판국에 ‘황제휴가’ 올인이 정답이었을까. ‘라면 형제’에 속수무책인 지방행정의 둔한 촉수, 구멍이 뻥 뚫린 사회안전망에 대해 매섭게 추궁하는 장면은 없었다. 국민의 고통을 체감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역겨운 3류정치다.

지금 민생은 한 뼘의 마스크에 결박돼 신음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한 방역이라는 공공재는 부자(富者)와 빈자(貧者) 모두가 평등하게 누리고 있다. 하지만 휴·폐업과 실직, 소득의 감소라는 가혹한 비용은 영세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이른바 취약계층에 집중되고 있다. 화마(火魔)가 삼켜버린 ‘라면 형제’의 고통이 그 증거다.

여의도 섬의 견고한 콜로세움과 천하를 호령하는 북악산의 위압적 구중궁궐에는 ‘라면 형제’의 비명이 도달하지 못한다. 추호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청와대와 법무장관에게 거리의 민심은 분노한다. 제1 야당의 추궁은 정당하지만 민생 이슈까지 포기하는 건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문 정부는 ‘삼호어묵’이라는 특이한 필명으로 엉터리 부동산 정책을 융단폭격하는 거리의 주부 논객을 민생의 사부(師父)로 모셔야 마땅하다. 초등학생 아이를 둔 39세의 국어 강사는 대학 때 운동권이었고, 결혼 전까지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를 전전했다.

그녀는 조선일보 김미리 기자와의 카톡 인터뷰에서 “민생이나 부동산 시장의 문제를 짚고 해결책을 내는 게 아니라 이념에 맞춰 정책을 내요. (중략)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인정하지 않고 죄악시하는 게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이 발신한 “부동산 대책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집값 상승세가 진정되고 있다”는 초현실적 주술이 허구임을 증명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국민은 한번 정부의 돈에 맛들이면 거기에서 떨어져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의도와 달리 방역을 위해 사지(死地)로 내몰리고 있는 취약계층의 절박한 처지를 모욕하자는 것으로 비친다. 장제원 의원이 “국민이 기생충인가. 천민으로 취급하면서 어떻게 정치라는 것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은 건 정당하다. 기본소득제를 정강정책에 선제적으로 반영한 바로 그 인물의 발언이 맞는가.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재난과 슬픔의 연대를 강조했다. “내가 당한 재난에 대해 어떠한 동류의식도 가지지 않거나 나를 괴롭히고 있는 슬픔을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중략) 나는 당신의 얼음처럼 차가운 무감각과 감정의 결핍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윤리는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윤리를 무시한 경제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탐욕일 뿐이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코로나19로 소득이 증가한 사람의 증가분에 5%를 부과해 10조원을 마련하자”며 특별재난연대세 도입을 제안했다. 이재웅 쏘카 창업자가 “응원한다”고 했다. 적어도 방향은 윤리적이다. 성사된다면 한국을 “인정사정없는 사회(brutal society)”라고 비판했던 기 소르망도 다시 볼 것이다.

천상의 철학을 지상으로 끌어내린 현자(賢者) 소크라테스는 산중에 은거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했고, 아테네의 시장과 광장에서 남루한 옷을 걸치고 거리의 사람들과 대화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 선 채로 숙고했다. 한국의 정치권은 각자에게 익숙한 진영의 게토에 틀어박혀 민생과 무관한 부족전쟁을 하고 있다. 여당의 추장은 ‘문빠’, 야당은 ‘아스팔트 극우’다. 생산성 제로의 불임(不妊)정치다.

코로나 위기국면에서는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한데 모아야 한다. 경제를 살리고 서민을 보호하자니 방역이 뚫리고, 방역을 위해 거리두기를 강화하자니 민생이 무너진다. ‘라면 형제’의 비극은 바로 이 모순적 과제를 제기했다. 진보의 관용, 보수의 신중함이 모두 필요하다.

여야는 증오의 공간인 게토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살아 숨쉬는 인간의 한숨과 눈물, 희망과 기쁨이 뒤섞인 광장에 함께 서야 한다. ‘라면 형제’의 “살려주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어떻게든 현실적 타협과 통합을 이뤄내야 한다. 이걸 거부하면 공멸한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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