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30% 민주주의에 반감" 文정부 비판 英이코노미스트의 숨은 근거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 9. 21. 13:54 수정 2020. 9. 2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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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뷰파인더②]

●英이코노미스트 “文정권, 피포위의식 사로잡혀”
●같은 호에 韓언론에 보도 안 된 ‘세계가치관조사’ 결과 실려
●2018년 조사 결과, 한국인 중 ‘민주주의 반감’ 응답자 30%
●‘푸틴의 러시아’보다 민주주의 반감 커…이라크와 비슷한 수치
●‘산업화·민주화 동시 이룩한 한국’은 K방역처럼 ‘국뽕’일 뿐
●여권, 민주주의 앞세워 민주주의 제도 망가뜨려
●정권 비리 수사팀 좌천에 언론인 감옥행, 이것은 독재!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21대 국회 개원식이 열린 7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개원 축하연설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하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8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흥미로운 칼럼이 실렸다. 문재인 정권이 피포위의식(siege mentality)에 사로잡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코노미스트'는 문 정권이 비판 세력으로서 도덕적 권위를 획득하고 권력을 잡더니, 같은 기준이 자신들에게 적용되자 수긍하기는커녕 발끈하며 고소·고발을 일삼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이 구속된 사실도 언급했다. 독자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국내 언론의 외신발(發) 보도 행태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숱하게 일어나는 오역 논란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그렇다. 개별 외신이 갖는 속성과 논조, 맥락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자신이 지지하는 대상에 대해 긍정적 뉘앙스의 발언이 나오면 기뻐하고 부정적인 언급이 나오면 화를 내는 수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이번 '이코노미스트' 칼럼에 대한 보도 역시 그랬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던 시기부터 '월스트리트저널'을 정점으로 하는 해외 유력 경제지들이 우려를 표했던 것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코노미스트'가 경제지 가운데 문 정권에 우호적인 편에 속하는 매체였다. 이번 보도를 통해 비로소 입장을 바꾼 셈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같은 호에서 근거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 내용은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화제를 모은 피포위의식 칼럼은 우리가 다 알고 있던 내용을 정리해서 보도한 것이다. 반면 주목받지 못한 또 다른 보도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몰랐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의미심장한 차원을 넘어, 섬뜩하다.

러시아·이라크와 비교당해야 하는 정치 후진국

2019년 12월 23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이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매주 발행되는 '이코노미스트'의 마지막 페이지는 부고 기사가 차지한다. 그 바로 앞에는 중요한 통계 수치를 도표로 만들어 소개하는 그래픽 디테일(graphic detail)이란 코너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에 균열 벌어져"(A rift in democratic attitudes is opening up around the world)라는 제목과 함께 웹에 공개된 해당 기사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어 하지 않던 어떤 진실을 드러낸다. '산업화·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는 한국인의 자부심이 실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 Survey)는 1981년부터 시행됐는데, 약 100여개 국가에서 동일한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수행한 후 그 결과를 비교하는 프로젝트다. 본부는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비영리기구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다방면에서 세계인의 가치관 변화를 긴 시간대에 걸쳐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로 인정받고 있다. 

가장 최근 자료는 2017년 중반부터 2020년 초까지의 연구를 집약한 7차 조사(Wave 7)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2018년에 진행됐다. 촛불시위로 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뒤이어 치러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1년가량의 시간이 흐른 뒤다. 

세계가치관조사에 따르면 한국 민주주의 근간은 위태로워 보인다. "우리나라의 통치 방법으로써 다음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큰 주제 하에, 238번 문항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호오를 묻고 있다. 한국인들의 응답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원자료를 확인해보면 '대단히 좋다' 18.5%, '약간 좋다' 51.6%, '약간 나쁘다' 25.1%, '대단히 나쁘다' 4.9%로 부정적인 응답이 합산 30.0%에 달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수준의 반감은 1995년~1998년 진행된 3차 조사(Wave 3) 당시 러시아에서나 나왔던 수치다. 옛 소련 몰락 이후 극도로 피폐해졌던 옐친 대통령 집권 당시의 러시아 말이다. 같은 7차 조사를 놓고 비교해보더라도 문제는 여전하다. 푸틴 대통령이 종신 집권을 꾀하고 있는 러시아에서조차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답변이 채 20%가 되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는 그래프를 통해 현재 정당과 의회가 중심이 된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히 큰 나라로 두 국가를 지목한다. 하나는 대한민국, 또 하나는 이라크다. 이라크인들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해 약 40%가 약간 나쁘거나 대단히 나쁘다고 응답했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후 지금까지 혼돈의 늪에 빠져 있는 그 이라크가 '민주주의'라는 지표에서 한국과 비교대상에 올라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국뽕 서사'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서모(27) 씨의 ‘군복무 휴가 특혜’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9월 16일 경기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앞에 추 장관을 응원하는 화환이 놓여 있다. [뉴스1]
문재인 정권 들어 주로 30대와 40대 사이에 만연한 '국뽕 서사'가 있다.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평화적·수평적으로 정권교체를 이뤄낸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뤄낸 세계 유일의 국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가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었다는, 이른바 'K-방역'의 승전보가 언론에 연일 울려 퍼지며 국민의 들뜬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간 듯하다. 

얼마 전까지는 나 또한 일정 정도 이에 동의했다. 그것을 자칭 '민주화 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현실이 문제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당과 의회를 통한 민주주의에 대해 국민의 30%가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나라라면, 언제 어떤 식으로건 민주주의가 쓰러지거나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은 제도적 측면에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민주주의 선진국이다. 반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만을 놓고 보면 1990년대 후반 러시아나 오늘날의 이라크 등 민주주의가 망가져 있다고 평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와 비교될 수준이다. 

이 결과를 납득하기 어려웠기에 나는 세계가치관조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호감 여부를 묻는 질문은 세계가치관조사의 4차 조사에서 처음 등장했다. 다행히도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설문조사 자료도 모두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해당 질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응답 추이는 다음과 같다. 

1995년에는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응답이 15.2%로 지금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2001년에는 13.5%로 조금 더 낮아졌다. 2005년에는 22.8%, 2010년에는 24.6%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해 '나쁘다' 혹은 '매우 나쁘다'라고 응답했다. 이렇듯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특정 시점 이후로는 계속 커져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10명 가운데 3명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과 의회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품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에서 한국은 러시아·이라크와 비교당해야 하는 정치 후진국이 되고 말았다. 현 정권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부정적 답변이 30%나 나온 책임은 문재인 정권에 있다고 봐야 한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 이후 분열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민주적 제도와 절차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87년 체제' 이후를 기획해야 할 역사적 과업을 제대로 수행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테니 말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이코노미스트'도 아는데

대통령 직선제는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보스 정치인'의 리더십으로 이뤄졌다. 이제는 공정한 룰(rule)과 투명한 제도, 합리적 소통에 터를 잡은 민주주의를 구성해야 할 때다. 그것이 탄핵 정국 이후 온 국민의 염원이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취임 직후 발표했다면 개헌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이코노미스트'도 알다시피 문재인 대통령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정권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 수사팀을 뿔뿔이 찢어 사방팔방 좌천시켰다. 말끝마다 검찰개혁을 들먹이며 '공수처법'을 통과시켜놓더니, 야당이 협조하지 않자 이제는 야당을 완전히 배제한 채 공수처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겠다고 했다. 

이것은 독재다. 적어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세계가치관조사가 제시한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르면 그렇다.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의회와 정당이 중심에 서야 온전한 민주주의다. 대한민국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여당은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기어이 독식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전례가 없던 일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판사와 공무원, 국회의원을 겁박하기 위해 '친위 조직'인 공수처를 밀어붙였다. 입맛에 맞지 않는 뉴스를 '가짜뉴스'로 낙인찍고 처벌하겠다는 어엿한 독재 법안까지 들먹이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한국 민주주의를 '나쁘다'고 보는 30%는 대체 누구일까? 세계가치관조사가 제공하는 자료를 분석해보면 응답자의 성별, 연령, 정치 성향 등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해석 방법론을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어떤 확정적인 답을 하지는 않겠다. 

다만 두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특히 의회와 정당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과 반감의 수준은 통상적인 민주주의 선진국과는 차원이 다르게 나쁘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통계와 그래프를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둘째, 청와대와 여당이 민주주의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행보를 밟고 있는데도 정권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율이 흔들리지 않는다. 

1987년 개헌 이래 법사위원장은 언제나 야당 몫이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정치와 의회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다. 그런데 당시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 상에서는 실명을 내걸고 번듯한 직함을 자랑하며 점잖은 말투로 문재인 정권의 '막가파 행태'를 옹호하는 고학력 인사들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의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권에 철통같은 지지를 보낸 거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민주주의라는 제도나 가치가 아니라, 선거에서 이긴 현 정권만을 지지하는 행위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중 일부 혹은 상당수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으로 응답한 30%에 들어가리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국뽕은 인민의 아편이다

젊은층을 향해 호소하고 싶다. 민주주의는 한국인의 '종특'(종족 특성)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특산물'도 아니다. 대통령과 여당이 무슨 짓을 하건 '묻지마 지지'를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짓이다. 민주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경제가 위태로워진다. 정치 불안은 경제 불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짧은 시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 우리의 자랑거리다. 그 성취는 언제라도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건전한 시민의 상식으로 가꾸고 지켜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불닭볶음면을 먹으며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달라는 외국인 유튜버 같은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고 있다. 국뽕은 인민의 아편이다. 깨어나 현실을 바라볼 때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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