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시시각각] 왜 김대중을 다시 얘기하는가

김동호 2020. 9. 23.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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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진보라도 현 정부 너무 달라
그때는 위기 넘기고 성과도 많아
현 정부도 남은 임기 최선 다해야
김동호 논설위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사람을 최근 만났다. 그가 밝힌 당시 김대중의 생각은 21세기 시대상황에서 출발한다. 21세기는 화해 시대고, 우리 내부에서도 보수·진보의 화해가 필요했던 시절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DJP연합(김대중·김종필 연합)이다. 냉전의 낙오자가 된 북한에도 손을 내밀고 일본과도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 문화 개방은 극심한 저항에 부닥쳤다. 하지만 김대중은 “문화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일본 문화를 지배했던 우리가 겁낼 필요 없다. 과거의 한·일 관계를 다시 복구하자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런 시대정신은 김대중·오부치의 파트너십으로 구현됐다. 이를 계기로 2000년대로 들어서자 ‘겨울연가’를 필두로 한류 문화가 일본을 휩쓸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형편도 넉넉해져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코끼리표 밥통을 사고, 소니 워크맨 갖는 게 소박한 꿈이었던 못살던 시대가 지나갔다.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한국 경제는 풍전등화였다. 외환보유액이 바닥을 드러내 환율이 치솟고 금리가 고공 행진했다. 5대 시중은행이 문 닫고, 30대 대기업 중 16개가 간판을 내렸다. 거리에는 200만 실업자가 쏟아졌고, 신규 취업은 무더기로 취소됐다. 하지만 곧 반전이 있었다. 그 원동력은 국민적 단합이었다. 외채상환을 위해 자발적으로 돌반지·결혼반지를 내놨고, 한국은 3년 만에 외환위기 극복에 성공했다.

위기를 극복하자 남은 임기는 2년에 불과했다. 그래도 김대중은 많은 일을 했다. 무엇보다 큰 업적은 정보기술(IT) 혁명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낡은 규제를 손보고 코스닥을 개장해 투자와 창업을 자극했다. 규제를 너무 푸는 바람에 정부 자금을 빼먹는 벤처기업의 도덕적 해이도 만연했다. 그만큼 정부의 경제 살리기 의지가 강력했다. 그런 노력이 지금 한국 경제의 성장엔진이 된 정보통신기술(ICT)의 발판이 됐다. 국가부도 직전 상황에서도 외교와 경제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뒀다.

오래된 일이 주마등처럼 떠오른 건 최근 만난 김대중의 그 핵심 인사가 “문재인 정부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정부”라고 속내를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시장·안보가 무너지고 있다”고 한탄했다. 왜 이런 분노가 쏟아질까. 우선 자유를 보자. 청와대 소통수석 출신 여당 국회의원의 “카카오 드루와”를 비롯해 포털의 검색조작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언론 자유가 위협받으면 정권의 힘은 무소불위가 된다. 다른 모든 자유를 잃게 된다.

이런 억압적 분위기는 경제활동과 직결된다.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19를 계기로 핵심 제조업의 국내 유턴을 서두르고 있지만 한국에선 국내에 있던 기업도 줄지어 밖으로 나가고 있다. 최저임금 과속, 근로시간 단축도 모자라 ‘공정’이라는 허울의 ‘기업규제 3법’으로 반(反)시장·반기업 정책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안보 역시 그 근간인 한·미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게 확연하다.

그 악조건에서도 경제를 살린 김대중 정부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외환보유액도 많고 반도체 강국인 데다 은행과 대기업도 탄탄하다. 얼마나 여건이 좋은가. 그런데도 코로나19 전부터 자영업이 도탄에 빠지고, 소득격차가 커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영 논리를 앞세운 이념적 정책실험으로 4차 산업혁명의 기회마저 놓치고 있는 게 참담한 현실 아닌가. 지금이라도 ‘문빠’라는 팬덤 정치의 유혹을 끊고 탕평책을 써서 국민 화합을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 통신비 같은 현금 살포로 국민을 포퓰리즘에 중독시키는 유혹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마침 일본에선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실체도 없는 토착 왜구 몰이의 유혹에서도 벗어나 상생 외교를 펼쳐야 한다. 앞으로 남은 20개월은 역사의 기록도 바꿀 수 있는 시간이다. 김대중처럼 진보 정부의 가치를 보여주길 바란다.

김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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