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의 시선] "국민이 지도자를 의심하는 나라, 발전 없어"

이정민 2020. 9. 24.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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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신 계승한 문재인 정권
반칙과 특혜, 불·탈법 싸고돌아
노무현 정신 유린이며 국민 배신
이정민 논설위원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다. “특정 지역·특정 학교 출신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상, 뿌리 깊은 특권 의식을 청산해야 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성공하는 것은 소중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성공하고 난 뒤에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약자들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 성공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봐도 전율이 느껴지는 명연설이다. 그러나 그 역시 반칙과 특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통령이었다. 재임 중의 비리 사건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참모들이 전하는 에피소드 두 가지.

#노 대통령이 전직 관료 A씨를 청와대로 불렀다. 국토부 장관 지명을 통보할 참이었다. 조찬 회동 직전 대통령은 민정수석실로부터 서류 봉투 하나를 받는다. A씨가 해외 출장 때 가족을 대동한 횟수와 관련 기록이 들어있는 인사 자료였다. A씨를 적임자로 점찍어온 대통령은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못 본 척 슬쩍 넘어갈 수도 있었다. 심사가 복잡했을 대통령은 끝내 ‘장관을 맡아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가족을 출장에 동반한 편법을 특권 의식과 반칙으로 본 것이다.

#대선 후보 시절, TV토론을 앞두고 한 참모가 방송사로부터 질문 개요를 입수했다. 일종의 관행이었다. 보고를 받은 노 후보는 “이건 반칙 아니냐. 나한테 알려주지 말라”며 역정을 냈다. 미리 귀띔을 받는 것조차 원칙을 벗어난 특혜로 여겼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의 정치적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평등·공정·정의로 압축되는 취임사로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 정부를 자처했다. 그러나 3년 4개월이 지난 지금,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는 정적을 잡고 반대편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을 뿐이다. 자기편끼리 권력과 자리를 나누고, 반칙과 특혜에 눈 감으며, 심지어 불·탈법마저 감싸고 돈다.

고교 때 영어 의학논문 제1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허위 인턴활동 증명서로 명문대에 합격한 딸. 19일의 병가를 쓰고도 군에 복귀하지 않고 휴대폰으로 휴가를 연장한 아들. ‘아빠 찬스’ ‘엄마 찬스’를 가진 특권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게 명백한데도, 부끄러워할 줄조차 모르는 이들이 연이어 ‘정의부(Ministry of Justice)’의 수장에 발탁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노무현 정신은 실종 상태다.

불공정과 특혜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자 집권당은 ‘옛날에는 이보다 더했어’라며 야당과 언론을 윽박지른다. 과연 그럴까. 국민 대다수가 헐벗고 가난하던 시대엔 공정 이슈가 지금만큼 민감하지 않았다. 고도성장으로 나눠 먹을 파이가 커지면서 낙수효과가 생겨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민에게 두루 성장의 떡고물이 배분됐기 때문이다. ‘벼락출세’ ‘개천의 용’이란 말이 상징하듯 신분 상승과 계층 이동이 빈번히 이뤄졌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기회를 잡으면 누구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성장세가 둔화한 지금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있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가 교육의 기회를 결정짓고, 직업과 평생의 삶을 결정하는 구조가 고착화하고 있다. 출발점에서의 차이가 일자리와 삶의 격차를 벌어지게 하는 사회에선 절차와 과정에서의 공정성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다. ‘돈도 실력이야’라고 뽐낸 최순실의 딸, 필기시험 한번 안 치고 대학에 간 조국의 딸, 전화 한 통으로 휴가를 연장한 추미애의 아들에 청년들이 분노하는 이유다. ‘병역기피에 비하면 편법적인 휴가 연장은 작은 불공정’이란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노무현은 이 점을 간파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사회적 신뢰 자본’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02년 민주당 후보 수락 연설에서 그는 “경제 성장과 번영도 원칙이 바로 서야 제대로 이뤄질 것이다. 지도자가 반칙하는 나라, 국민이 지도자를 의심하는 나라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고 외쳤다. 노무현 정신의 진수다.

문 대통령이 최근 37차례나 ‘공정’을 언급해 뒷말이 무성하다. 조국 사태 와중에 그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했던 문 대통령은 “공정은 촛불혁명의 정신이며 우리 정부의 흔들리지 않는 목표”라고 강조한 이튿날 추미애 장관과 나란히 회의에 참석했다. 국민 절반 이상(55.7%, 알앤써치 조사)이 사퇴를 요구하는데 추 장관에게 면죄부를 준 모양새다. 노무현 정신의 계승자를 자처한 정권이 ‘지도자의 반칙을 용인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이 기막힌 역설은 노무현 정신의 유린이며,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다.

이정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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