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는 고개 빳빳이 들고 떠드는데.. 전쟁서 아들 잃은 어머니는 왜 말 없었을까"

최보식 선임기자 2020. 9. 28.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공수부대 근무한 文대통령, 秋아들이 시끄럽게 해도 구경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노병(老兵)의 갑갑증을 좀 풀어줄 수 없습니까.”

김광휘(79)씨가 어눌한 어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한 시절을 풍미한 라디오 프로그램 ‘홈런 출발’과 ‘격동 50년’, TV 드라마 ‘제4공화국’ 등의 대본을 썼던 작가인데, 무슨 심사인지 자신을 ‘노병’으로 칭했다. 서울대 사대 국어과를 졸업한 그는 포병 소위(ROTC 2기)로 월남전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월남전에서 전사한 중대원 7명이 묻혀있습니다. 살아남은 우리 전우들은 1978년부터 해마다 현충일이면 국립묘지를 참배해왔습니다. 많을 때는 50~60명쯤 모이다가 해가 갈수록 다들 늙고 병들어, 올해는 코로나 사태까지 겹쳐 3명만 나왔습니다. 우리가 참배하는 날이면 고(故) 손진수 일등병의 어머니도 경북 안강읍에서 중앙선 밤 열차를 타고 올라오세요. 국립묘지가 문을 열기도 전에 항상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2009년 이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추미애의 당당함

―전화로 불쑥 이런 얘기를 꺼내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당당하게 떠드는 추미애 장관을 뉴스에서 보고 있으면 그런 손 일등병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서요. 어머니는 향을 피우고 소주를 뿌려준 뒤 묘비를 쓰다듬으며 멍하니 앉아있어요.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면 우리 손을 잡고 ‘와줘서 고마워요’라고 합니다.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묻지도 않고 누구를 향해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추미애 뉴스가 나올 때마다 그 어머니의 말없는 모습이 맺힙니다. 이게 저의 갑갑증입니다.”

다음 날 서울 광화문의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그는 55년 세월이 지났을 월남전 당시의 사진과 일기(日記), 작전 지도, 문서 등을 갖고 나왔다. 자신의 말을 입증해줄 일종의 증거 자료였다. 그는 전날 통화에서 했던 말을 이어갔다.

“손 일등병의 어머니가 지금까지 살아서 추미애 장관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기 아들을 방어하는 모습을 봤으면 어떠했을까. 정작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왜 말 한마디 못했을까요. 과연 할 말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추미애처럼 똑똑하지 못해서일까요. 세상에는 진짜 가슴이 찢어지는 사람들은 속으로 삼키고,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사람은 저 잘났다고 떠들어댑니다.”

―추 장관은 자신이나 아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자식 문제가 있으면 부모는 우선 ‘제 불찰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오면서 보고 배운 기본 상식입니다. 추미애는 그 나이 동안 무얼 배웠습니까. 추 장관이 ‘국정에 바쁘다 보니 자식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 같다. 제가 불민한 탓이다. 법무 장관으로서 이런 모습을 보여줘 국민에게 죄송하다’라고 말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현 정권에서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은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말해봐야 속만 터지는 추 장관과 관련된 얘기는 그만하고 화제를 돌리겠습니다. 어떻게 월남전에 참전하게 됐지요?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인접국도 같이 넘어간다는 ‘도미노 이론’이 있었지요. 그때 파병하지 않으면 한국에 주둔한 미군 2개 사단 중 하나가 빠지게 돼있었고요. 그 이상의 정치적 결정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군인은 나라가 필요로 하면 가는 것뿐이지요. 나는 전쟁 체험을 나중에 작품으로 써보겠다는 개인적 동기도 컸습니다.”

1965년 10월 그는 맹호부대(수도사단) 선발대로 떠났다. 그때까지 한국이라는 흑백(黑白) 세계에 살았는데, 베트남은 야자수와 바나나 등 총천연색이었다. 그는 이를 ‘녹색 멀미를 했다’고 표현했다.그는 1연대 1대대 3중대 관측장교 보직을 받았다. 중대장은 장세동(張世東)이었다. 그의 부대는 베트남 중부의 퀴논항(港)에 있었다. 미군이 싸우던 전투 지역을 인계했다. 손진수 일등병이 숨진 전투는 1966년 4월 19일에 있었다. 부대에서는 이를 ’419 전투'로 불렀다.

“그날 전투에서 전우 다섯 명이 베트콩의 자동화기에 당했습니다. 사병으로는 유일하게 손 일등병이 전사했고 육사 출신 장교 4명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눈과 대퇴부 등에 총을 맞았습니다.”

―어떠했기에 장교 4명이나 총을 맞았나요?

“그때 육사 출신 장교는 다들 앞장을 섰습니다. 명예심과 감투 정신이 살아있었습니다. 장세동 중대장도 그 전투에서 오른쪽 어깨가 관통됐습니다.”

―나이를 계산해보면 소대장들은 모두 이십대 중·후반이었고, 장세동은 서른 살이었습니다. 나라가 젊은이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하지요. 그 전투에서 본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관측장교라 중대장 바로 곁에 있었지요. 나는 총소리에 놀라 엎드렸는데, 장세동은 부하 소대장이 총 맞은 걸 보고 지휘를 하려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순간 당했습니다. 그는 내게 기댄 채 쓰러졌고 ‘대신 지휘를 맡으라’며 피 묻은 작전 지도를 넘겨줬어요. 그날 베트콩의 총격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나는 장세동 중대장을 둘러업은 채 포복했습니다.”

월남전 세 번 파병

―중상을 입은 장세동은 어떻게 됐나요?

“즉시 헬리콥터를 불러 사단 야전병원으로 후송시켰습니다. 당시 전두환 중령이 월남에 와서 그를 문병했습니다. 그게 둘 사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장세동이 ‘선배님, 제 골대(어깨)가 부러졌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전두환은 ‘자네가 육사 체면을 살려줬어’라고 격려했어요.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군인의 기백을 보여줬다는 뜻이지요. 장세동은 부상 정도가 심해 필리핀에 있는 미군 클라크기지를 거쳐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총알이 관통된 어깨는 완치가 됐습니까?

“부스러진 쇄골을 꿰맞추고 철심을 박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상이용사로 조기 전역을 원치 않았습니다. 1년 뒤 깁스를 한 채 장세동은 월남 2진(陣) 파병을 준비 중인 백마부대(9사단) 이소동 사단장을 찾아갔습니다. 월남에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한 겁니다. 팔을 들어 경례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깁스한 상태로 월남전에 다시 가겠다고 한 겁니까?

“이소동 사단장이 ‘군인은 그런 기백이 있어야지. 깁스를 풀고서 다시 찾아오라’며 금일봉을 줬어요. 온천에 가서 재활하라고 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장세동은 백마부대와 함께 전투서열장교로 다시 월남에 갔습니다. 그 뒤 전두환이 29연대장으로 파병됐을 때 정보주임장교로 세 번째 월남전에 참전했어요. 월남전 세 번 파병 기록은 그가 유일할 겁니다.”

5공 시절 장세동이 청와대 경호실장에 발탁됐을 때 그는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찾아가거나 민원 청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편지로만 안부를 전하겠다’고 말하자, 장세동은 ‘자네 글씨체는 특이해 금방 편지를 알아볼 것’이라고 말했다.

“현충일을 앞두고 내가 ‘전우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갑니다’라고 편지를 보내면 장세동은 50만원이 든 봉투를 보내옵니다. 그때는 나도 돈 잘 버는 방송작가였습니다. 매년 참배를 마치면 중대원들에게 술과 식사를 대접했지요. 우리는 ‘장세동 중대’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장세동은 전두환에 대한 ‘의리’로 유명했지만, 군인으로서의 평판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월남전에서 장세동은 헌신적인 군인, 용감한 청년 장교, 공평무사한 지휘관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 뒤 역사의 격랑에 휘말렸지만….”

―그는 12·12 사건 등에 연루돼 세 차례나 투옥됐지요?

“노태우 정권에서 한 번, 김영삼 정권에서 두 번 옥고를 치렀지요. 마지막으로 의정부 교도소에 갇혀있던 1997년, 장세동 아내가 찾아와 ‘월남전에서 총 맞은 부위가 잘못돼 어깨 한쪽을 못 쓰게 됐다’고 울었어요. 6월인데도 장세동은 추위를 타 겨울옷을 못 벗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고교 동창인 김종구 법무장관을 찾아가 이런 사정을 전했습니다.”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세우기’ 재판에서 장세동은 3년 6개월 선고를 받았지요.

“이 때문에 김종구 장관은 ‘나는 임명된 지 얼마 안 되는 신출내기 장관이고, 장세동은 국사범인데 어떻게 봐주겠나’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는 ‘장세동이 월남전에서 총 맞은 게 사실이라면 사나이 김영삼에게 말은 해보겠다’고 했어요. 다음 날 오후 김 장관이 ‘장세동이 정말 전투에서 총 맞은 것인지 입증하라는 YS의 말씀이 있었다’고 연락 왔어요. 나는 당시 전투 상황 기록과 함께 부대원들 28명의 지장을 받아 제출했어요.”그 직후 장세동은 경희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잔여 형기 석 달을 병원에서 수술받도록 해준 것이다.

구경하는 문재인

―어쩌다가 장세동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됐군요. 그런데 이것이 지금 상황과 어떻게 연결되는 겁니까?

“군대를 안 갔던 YS도 국가를 위해 전투에서 다쳤다고 하니까 정적(政敵) 장세동을 풀어줬어요. 역대 대통령은 적어도 이렇게 큰 정치를 했어요.”

―문 대통령은 강제 징집돼 공수부대에서 근무했는데?

“어떤 마음으로 군 생활을 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군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잖아요. 휴가를 나와서 전화 한 통으로 기간을 연장하는 것 따위는 군대에서 있을 수 없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추미애 장관이 카투사 아들을 두고 시끄럽게 하고 군 지휘부가 나서서 비굴하게 이를 변호해주는 모습을 문 대통령은 청와대 안에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와 만난 날 저녁, 서해상에서 우리 공무원이 북한군에게 총살당하고 불태워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이 이를 보고받고도 하루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국민에게 숨겨온 게 드러났다. 그 은폐의 시간 동안 ‘종전 선언’ 운운하는 유엔 연설을 했고 아카펠라 공연을 즐겼다. 대통령직(職)이 무엇을 해야 하는 자리인지 대통령이 알지 못하고, 군(軍)은 명예심을 잃고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모르는 집단이 됐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