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살다 이런 추석은 처음.."코로나 핑계대는 아내 얄밉다"
“이맘때면 아내가 예민해졌는데, 올해는 얼굴이 밝은 것 같네요. ”
대기업 부장 최모(50) 씨는 이번 추석 고향에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결혼 후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경남의 80세 노부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최씨는 “형이랑 남자만이라도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코로나로 웬만하면 오지 말라고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어버이날 즈음에 팔순 잔치를 하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추석으로 미뤘는데 결국 못하게 됐다. 부산 처가에도 같은 이유로 가지 않는다. 최씨는 “양가에 이미 선물과 용돈을 보냈다. 친구들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최씨는 “대개 명절 때 2박 3일은 본가에서 보낸다. 3형제 식구가 10명이 넘는데, 아내를 비롯한 동서 셋이서 명절 음식 준비하고 세 끼 챙기고 설거지하는 게 장난 아니다. 뒤돌아서면 집안일이 쌓여 있는데 남자들은 손끝도 까딱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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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말라” 부모에…어쩌다 자유
올 추석 며느리들이 지긋지긋한 명절 증후군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상 초유의 언택트(비대면) 한가위가 뜻하지 않게 며느리들의 행복지수를 올리게 됐다. 노부모들이 ‘거리두기가 곧 효’라는 정부 방침에 호응하면서 귀성이 대폭 줄었다. 코로나가 며느리들의 반란 지원군이 됐다. 자식들이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는 일. 대부분 노부모가 먼저 “오지 말라”고 나섰다. 지자체가 “불효자는 옵니다”라고 주도했고, 노인들끼리 모여서 “그리하자”고 호응했다.
결혼 9년 차 김모(35) 씨는 “86세의 큰아버님이 일일이 전화해서 오지 말라고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애들 옷을 사 보내시더니 이번 명절은 이렇게 끝내자고 하더라”고 말했다. 임신했을 때를 빼면 시부모님을 뵙지 않는 명절이 처음이라고 한다. 임신 4개월 차인 이모(31) 씨도 “임신 초기라 안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먼저 오지 말라고 해서 다행”이라며 “지난 추석 때 전북 고창까지 내려가는 데 10시간 걸렸다. 교통·감염·선물 걱정 등에서 다 벗어날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결혼 4년 차 이모(32) 씨는 “큰집에 가면 시어머니도 며느리 입장이 돼 눈치가 보여서인지 제게 집안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올해는 큰집에 가지 않아 부담이 덜하다”고 말한다.
모처럼 명절 노동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려는 며느리도 있다. 경기도에 사는 강모(42) 씨는 추석에 가족 여행을 가려고 강원도 속초 리조트를 예약했다. 양가에서 오지 말라고 해서다. 고향에 못 가는 건 아쉽지만, 명절에 집안일 안 하고 편히 쉬어보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른다. 강씨는 “시어머니께서 이번엔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해서 따르기로 했다”며 “결혼 12년 만에 처음이다. 여름 휴가 때도 코로나로 ‘집콕’(집안에 콕 박혀 생활)한 터라 이번엔 마스크를 잘 쓰고 바다 보러 간다”고 말했다. 강씨는 “부모님께 미리 용돈을 챙겨 보냈다. 코로나가 좀 나아지면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강씨 가족만이 아니다. 고향 대신 관광지를 찾는 ‘추캉스(추석+바캉스)’족이 상당할 전망이다. 제주도와 제주관광협회는 추석 연휴 5일간 19만8000명의 관광객이 제주도를 찾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 관광업계 관계자는 “연휴 동안 하루 4만~5만 명 정도 들를 전망인데 코로나19 확산 전 주말 연휴 관광객 수준”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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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제대로 말 못해” 귀성 문제로 갈등도
아직 정하지 못해 부부 갈등이 벌어진 경우도 있다. 한 여성은 맘 카페에 “추석 때 안 가기로 남편과 결정했는데, 남편이 시댁에 확실하게 ‘못 간다’고 말을 못 한다. 그러더니 남편이 ‘코로나 무섭다고 마트도 안 갈 거냐’ ‘코로나 때문에 고향에 안 내려가는 게 이상하다’고 말한다”고 호소했다. 그랬더니 “마트처럼 집 안에서도 친척들이 모여 마스크 끼고 있는 것 아니지 않냐” “시가에서 미리 올해 오지 말라고 해주면 얼마나 좋냐“ 등의 여성 응원 댓글이 달렸다. 인터넷 맘 카페에는 “추석 때 시댁 가시나요”라며 이런 사연을 공유하는 글이 많다. “시부모가 찜질방을 자주 가셔 고민이다” “시어른들이 목욕탕에 다니시는지, 주변에 태극기 부대는 없는지 잘 알아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와 있다.
‘귀성 불가’를 선언한 아내도 있다. 결혼 3년 차 김지현(34) 씨는 18개월짜리 아이가 걱정돼 먼저 광주광역시의 시댁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모두를 위한 것(코로나로 인한 국민 건강 보호)이니까 당당하다”는 게 김씨 얘기다. 김씨는 “시댁에 억지로 가는 친구들이 많다”며 “긴급재난문자로 하루에 12번씩 추석에 만남 자제하라고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난 22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코로나 때문에 시댁 안 간다는 아내가 밉다”는 글이 화제였다. 자신을 딸 둘의 아빠라고 소개한 남성은 “본가는 1년에 설, 추석 명절 2번 정도만 간다”며 “3월부터 코로나 때문에 반년 넘게 본가에 가지 못했다. 뭐만 하면 코로나 핑계 대는 아내 때문에 짜증 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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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끼리 눈치 “먼저 말 꺼내 봐” 미루다 귀성길
시어머니가 오라고 하면 어쩔 수 없다. 박모(31) 씨는 “시어머니가 당연히 와서 제사 음식 준비를 거들라고 해서 속상하다”고 말한다. 명절마다 절에 가는데 이 일정도 그대로 강행한다고 한다. 박씨는 “두 살짜리 딸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걱정된다. 시어머니한테 말도 못하겠고 당연히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예순을 바라보는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경기도 화성의 결혼 27년 차 최모(59) 씨도 “남편네 형제가 다섯명”이라며 “친한 동서와 ‘우리 집은 왜 오지 말라는 소리 안 하냐’ ‘네가 먼저 안 간다고 얘기해봐라’고 했는데 결국 서로 미루다 가게 됐다”고 했다. 최씨는 “모두 모이면 20명 정도 되는 대가족이다. 잘 때 빼고 거의 일만 한다”면서 “우리 세대까지가 마지막이면 좋겠다. 며느리들에게 부담 주지 않는 명절로 바뀌어야 한다”고 전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이번 추석 연휴 제발 없애주시길 부탁드립니다’는 글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며느리 된 입장에서 코로나 때문에 못 간다고 말 한마디 못하는 답답한 심정 아시냐”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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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증후군 올해는 줄어들까
눈치싸움 끝에 울며 겨자 먹기 귀성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인천에 사는 서모(33) 씨는 마음이 쓰여 결국 창원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시댁에선 되레 오지 말라고 했는데 친정 부모님이 서운해하는 바람에 장시간 귀향을 마음먹은 것이다. 서씨는 “‘이번 명절에 손주도 못 보는 거냐’며 섭섭해하시더라”며 “남편을 설득해 추석 전 미리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윤모(35) 씨도 비슷한 이유로 경북 안동행을 결정했다. 윤씨는 “코로나가 걱정은 되지만, 명절 때 아니면 시부모님에게 애들을 보여주기도 힘들다”면서 “시부모님이 ‘편할 대로 하라’고는 하셨지만 막상 가지 않으면 적적해하실 것 같아 애들을 데리고 다녀올 계획”이라고 말했다.
명절 증후군은 여성만의 스트레스다. 2018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서울시 성평등 생활사전-추석특집’ 조사를 보면 시민 1170명 가운데 절반 이상(53.3%)은 명절 때 겪는 성차별 사례 1위로 여성만의 상차림 등을 시키는 ‘가사 분담’을 꼽았다. 통계청의 2019년 생활시간조사에서 가사분담 만족도를 보면 ‘불만족(약간 불만족+매우 불만족)’ 비율이 남자는 3.5%, 여자는 11.7%이다. 맞벌이 부부는 남자 3.6%, 여자 14.6%이다. 여자의 불만이 훨씬 높다. 이런 영향인지 부부 갈등도 명절을 전후해 증폭된다. 대법원의 최근 3년간(2017~2019년) 전국 법원 협의이혼 월별 신청 건수를 분석한 결과 6번의 설‧추석이 있는 달보다 그다음 달에 모두 이혼 신청이 늘었다. 올해는 이런 경향이 좀 달라질 수 있을까.
황수연·이태윤·김지아·이우림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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