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軍이 하수처리장인가

양승식 기자 입력 2020. 9. 29.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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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식 정치부 기자

북한이 지난 25일 통지문을 통해 밝힌 해양수산부 공무원 A씨의 사살·소각 사건의 전모는 많은 사람을 갸우뚱하게 했다. 북한의 일방적인 사건 설명은 우리 군이 첩보 수집을 통해 밝힌 사실과 너무 달랐고 의혹투성이였다. 북측 선박이 A씨와 80m 떨어진 곳에서 말을 주고받았다거나, 비무장 상태인 A씨가 도주해 50m 밖에서 총을 쐈다는 얘기는 궤변에 가까웠다. 오히려 “북측이 방독면·방호복을 갖춰 입고 A씨에게 접근해 총살한 뒤 시신에 기름을 붓고 태웠다”는 우리 군의 첩보 보고가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북한이 이를 전면 부정하자 군은 납작 엎드렸다. 군 고위 관계자는 북한의 주장과 우리 군 첩보가 다르다는 지적에 “우리 정보를 객관적으로 다시 들여다볼 예정”이라고 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다시 관련 자료를 보겠다”고도 했다. 스스로 수집한 첩보를 다시 보겠다며 자기 부정을 한 것이다. 군 내부에선 “북한의 일방적 주장에 우리 군 첩보를 다시 꿰맞추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자조 섞인 얘기가 나왔다.

청와대와 정부 쪽에선 27일 북한이 통지문을 보낸 직후부터 공공연하게 군에 책임을 넘겼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군이 미숙한 상황 판단으로 상부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며 “북한의 통지서 내용을 보니 우리 군의 첩보 내용이 부정확하다”고 했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28일 “북한이 A씨를 구조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군의 초기 판단 잘못이 있었다고 고백한 셈이다. 그사이 청와대와 통일부, 국정원 등은 모두 뒤로 빠졌다. 청와대는 군으로부터 사살·소각을 보고받았으면서 책임이 없는 듯 모른 척했다. 북한과 연락 책임이 있는 국가정보원은 국민적 지탄이 쏟아질 때 내내 숨어 있다가 북한 통지문이 도착하자 제일 먼저 나서서 생색을 냈다. 우리 국민을 지키기 위해 북한과 소통해야 했던 통일부도 남북 간 연락선이 없다며 빠졌다. 군만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모양새다.

현 정권 들어 중대한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군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황제 휴가’ 의혹이 제기되자 여권에선 “군에서 행정처리를 잘못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청탁한 사람은 잘못이 없고, 이를 매끄럽게 처리 못한 일부 군 간부가 잘못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본격적으로 나서기도 전에 이미 “군에서 책임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는 말까지 돌았다. 결국 검찰은 28일 실제로 청탁한 보좌관과 추 장관 아들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군 간부만 군 검찰에 송치했다.

정부는 코로나 대책 등을 위해 추경을 편성할 때마다 국방비를 수천억원씩 삭감했다. 군 내부에선 “우리가 봉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군 수뇌부는 한마디 항변도 못했다. 결국 군이 이 정권의 하수처리장이 됐다는 비아냥을 자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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