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 칼럼] '핵무기 80개'의 진실

2020. 10. 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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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는 결코 '절대 반지'나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다. 핵무기 사용을 말하기는 쉽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다. 35년 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강조했듯 "핵전쟁에는 결코 승자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결코 싸워서는 안 되는 전쟁"이다. 이 말의 의미를 기억한다면 지금은 80개 핵무기의 사용이 아니라 그 제거를 먼저 고민해야 할 때다.

문정인 ㅣ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워싱턴포스트> 밥 우드워드 기자의 신간 <격노>가 인구에 오르내리고 있다. 초점은 ‘핵무기 80개’의 진실이다. 우드워드와의 인터뷰에서 제임스 매티스 전 미 국방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오마하에 있는 미 전략사령부는 핵무기 80개 사용 등 북한의 공격에 대한 미국의 대응으로 북한 정권교체를 위한 작계5027을 검토, 연구했다.” 이 문장의 해석을 두고 국내 주요 언론사 사이에 논쟁이 불거졌다. 조선, 중앙, 동아 등은 이 핵무기 80개를 미국의 보복 타격용으로, 한겨레는 반대로 북한이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로 해석했다. 문장의 모호한 표현 때문에 생긴 논란이다.

9월14일 미 공영라디오 엔피아르(NPR) 진행자 메리 켈리는 우드워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점에 대해 해명을 요청했다. 그가 전한 매티스 장관의 발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불량국가 북한이 24개 정도의 핵무기를 은닉하고 있는데 언제 미국을 타격할지 모른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에게 요격할 권한을 위임했다. 내가 요격하면 김정은은 아마도 남은 미사일을 모두 쏠 것이다. 누구도 수백만명을 태워 죽일 권한은 없다. 핵 선제타격을 할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라 김정은이다.’ 설명을 들어도 혼란은 가중된다. 여기서는 북한 보유 핵무기가 24개 정도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김정은이 이들 핵무기를 사용해 수백만명을 태워 죽일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와 미국의 요격, 그에 대한 북한의 대량 보복 발사라는 확전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미국의 선제 혹은 대응 타격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다. 이 대목에서 ‘핵무기 80개’는 실종된다.

애초부터 ‘핵무기 80개’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2017년 7월 말 당시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 수량을 25~30기로, 데이비드 올브라이트는 15~32기로, 미 정보당국은 최대 60개로 추정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점은 북한이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실증하기 전이었다. 물론 이때도 단거리 혹은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이용해 한국과 일본을 타격할 수는 있었지만, 북한이 핵무기 80개를 미 본토를 향해 발사한다는 시나리오는 당시는 물론 지금도 현실과 거리가 있다.

미국은 80개 이상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핵 버튼을 누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80개 이상의 핵무기로 선제공격하여 북한 전역을 초토화할 개연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아이시비엠으로 북한을 타격하려면 러시아 영공을 통과해야 한다. 이 경우 러시아가 오인해 이에 맞대응할 수 있다. 동북아에 전진 배치된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을 활용하는 것이 나은 대안이지만, 이 역시 미사일의 비행 각도를 고려하면 중국 쪽에 유사한 오인을 야기할 수 있다. 둘 다 기술적으로 쉬운 선택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오랜 기간 미국의 대북 핵사용 시나리오는 B-2, B-52 등 전략폭격기 활용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80개의 핵무기를 짧은 시간에 이 지역으로 이동해 북한의 방공망과 지휘통제시스템을 무력화하고, 토마호크 미사일 등으로 주요 방공망 거점을 와해한 후 이들 전폭기를 이용해 핵 공중투하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주한미군 가족이나 한국 거주 미국 시민들을 사전에 대피시켜야 하는 문제도 있다. 특히 이 정도 규모의 군사행동을 결정, 진행하면서 한국 정부의 동의 혹은 양해를 거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드워드의 문장에서 인용된 작계5027은 북한의 정권교체를 위한 계획이 아니라 북한의 대규모 남침에 대비한 한-미 연합 대응 작전계획이고, 여기에는 핵무기 사용 여부가 포함돼 있지 않았다. 더욱이 작계5027은 이미 2015년에 작계5015로 대체된 바 있다. 우드워드가 아무리 뛰어난 기자라 해도 한반도 문제나 핵전략, 운용교리에 대한 지식은 비전문가로서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문장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핵무기는 결코 ‘절대 반지’나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다. 핵무기 사용을 말하기는 쉽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다. 75년 전 미 폭격기에서 투하한 13㏏(킬로톤)급 원자탄 한방으로 일순간에 7만에서 8만명의 히로시마 시민들이 즉사했고, 도시 건물의 69%가 소실 파괴됐다. 35년 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강조했듯 “핵전쟁에는 결코 승자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결코 싸워서는 안 되는 전쟁”이다. 이 말의 의미를 기억한다면 지금은 80개 핵무기의 사용이 아니라 그 제거를 먼저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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