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질문을 불허하는 방역사회 / 엄지원

엄지원 2020. 10. 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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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원 ㅣ 사건팀장

추석 연휴에 서울 사는 언니 집을 찾았다. 지방에 계신 아버지는 찾아뵙지 못해 영상통화로만 만났다. 원래도 이렇다 할 효녀가 아닌데 정부가 방역을 위해 이동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한 마당이니 재차 불효를 감행했다. 페이스북을 여니 어느 여당 국회의원도 “고향 집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뵈러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19가 길을 막아선다. 공직자라서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고 글을 올렸다. 모범적이다. ‘그래, 누구나 동참할 때지’ 생각하면서도 액정화면 속 주름진 아버지 얼굴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때마침 근처에 사는 형부의 사촌 동생이 추석 선물을 전하러 방문했다. ‘뭐야, 다들 오가네.’ 부아가 났다. 그러나 사돈은 마스크와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명절 선물만 내려두고 부리나케 떠났다. 그는 현직 교사인데, 교육청에서 ‘친지 방문을 자제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고 했다. 그가 잠시 머물며 수다를 떤들 누가 신경 쓰랴 싶지만, 누가 동선을 점검하지 않아도 교사로서 스스로 아이와 동료들을 위해 경계한 것이다. 나 같은 민초를 비롯해 일선 공무원, 선출직 공직자까지 물샐틈없는 방어에 나선 명절이었다.

지난 3일 광화문광장에 약 3년 만에 등장한 ‘차벽’에 시민들이 별 저항감을 느끼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차벽이 들어서기 전 이미 시민들 마음에 하나하나 높고 단단한 방역의 방어벽이 들어섰다. 이때 차벽은 권력을 지키기 위한 궁궐 담장이 아니라 역병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키는 방호벽으로 기능한다. 적어도 ‘방역시민’ 마음속에선 그렇다.

코로나 시대 시민들 마음에 세워진 방어벽엔 개천절 집회를 막으려 설치된 90여개의 검문소가 집회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과잉금지’한 것인지 물을 여유가 없다. 이런 ‘고도 방역사회’는 정부의 방역 조처에 대한 질문들을 빙벽처럼 튕겨낸다. 그래서 나는 차벽 그 자체보다, 차벽에 대한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방역사회가 더욱 걱정스럽다.

정당한 목적이라도 수단이 지나치다면 허용되기 어렵다는 게 다수의 민주국가 헌법재판소가 대원칙으로 삼는 ‘과잉금지의 원칙’이다. “왜 그러한 제한이 필요한가, 그 목적이 과연 정당한가, 그것이 과연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조치인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질문이 계속되면서 편견이 하나씩 벗겨져나간다. 과잉금지 원칙의 최대의 성과는 편견과 관행으로 쉽고 편리하게 판단하고자 하는 권력에 대해 끈질기게 묻는 질문의 양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헌법연구관 출신인 헌법학자 김진한은 <헌법을 쓰는 시간>에서 이렇게 짚었다.

개천절 집회 제한 조처는 어떤가. 8·15 광화문 집회 뒤 코로나19가 재확산됐던 걸 고려할 때 이달 11일까지 ‘10인 이상 집회’를 금지한 서울시의 행정명령은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10대 미만의 차량이 참여하는 소규모 차량시위마저 모두 금지 통고하고 광화문광장까지 폐쇄한 경찰의 조처는 지나치다.

여권 일각에선 우파 단체들이 시위 뒤 뒤풀이 등 대면 모임에 나설 수도 있어 ‘드라이브스루’ 방식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고작 10명 이내의 소규모 집회다. 저녁마다 한강공원이나 번화가에 나가보면 숱한 시민들이 소규모 모임을 한다. 뒤풀이마저 누구에겐 허락되고 누구에겐 금지돼야 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도 방역사회에선 허용되지 않는다.

지난 1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행보도 물음표로 남는다. 많은 공무원이 그리운 가족을 랜선으로만 만나며 자제한 추석 연휴에 여당 대표는 꼭 봉하행을 감행해야 했을까. 우파 집회 엄단을 요청하면서 그는 20여명의 시민과 인증사진까지 남겨야만 했을까. 시민들에게 안 좋은 신호가 되진 않을까. 개천절을 채 넘기지 않고 이 대표는 경찰에 거듭 당부했다. “한글날 불법집회도 원천봉쇄하라.” 이번에도 질문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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