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민과 정부 사이에 세운 '경찰 차벽'은 시대착오다

2020. 10. 7.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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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정부'가 표현의 자유 억눌러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소통해야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과거 정권에서 경찰이 시위를 차단한다면서 차벽을 세우자 ‘명박 산성’ ‘근혜 산성’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국민의 지지를 얻어 집권한 정부가 차벽을 쌓아서 국민의 정당한 비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지를 비꼰 표현이었다.

그런데 권력의 차벽 설치를 앞장서서 비난하던 민주당이 집권한 이 정부에서 지난 3일 개천절에 ‘재인 산성’이 등장해 놀랐다. 촛불시위로 탄생한 정권에서 국민의 합법적 의사표시인 집회와 시위를 막기 위해 차벽을 세우는 것은 민주주의 본질에 어긋나고, 기본권의 과도한 제한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집회와 시위를 제한한 조치를 무작정 부당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본권이 절대적으로 보장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익을 위한 경우라도 합리적인 근거와 기준 없이 기본권을 무한정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헌법상 기본권에 대한 제한이 정당한지 여부는 그 근거와 기준의 합리성에 달려 있다. 지난 3일 광화문 집회의 제한은 그 근거가 분명치 않고, 기준 또한 합리적이지 않다. 그런데 9일 한글날 광화문에 다시 차벽을 세운다니, 이 정부의 정체성이 혼란스럽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은 기준의 일관성 결여로 인해 이미 설득력을 잃었다. 정부를 비판하는 집회에 대한 기준은 10인 이내로 엄격하게 적용된다. 그런데 코로나 확산 위험이 결코 덜하다고 볼 수 없는 지하철·버스, 시장과 쇼핑몰, 놀이공원 등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괜찮다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또한 차량 시위의 제한에 관한 기준도 납득하기 어렵다. 도대체 차량에서의 감염 위험성이 어떻기에 차량에 시위 참가자 1인만 탑승하고, 집회 도중에 절대 창문을 열지 못하게 하면서도 아홉 대 이하로 제한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더 황당한 것은 그런데도 경찰이 검문한다며 차량 창문을 일일이 열도록 요구해 집회 참가자의 신원을 확인한 행태는 코미디에 가깝다.

그 밖에도 인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로 지적할 수 있는 공권력 남용 사례가 적지 않았다. 지하철이 광화문 인근 역을 무정차 통과하고 버스 운행을 통제함으로써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끼쳤다.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불심검문 등은 군사독재 시절을 연상하게 했다.

10월 3일 개천절은 대한민국의 국경일이었다. 그런데 국경일에 태극기를 들고 가는 시민들을 무조건 불법 시위자로 취급한 정부의 처사는 민주정부라고 하기 어렵다. 이제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가 아니라는 말인가.

민주정부라면 그에 걸맞게 반대와 비판을 위한 집회에 대해서도 인권 존중을 우선해야 한다. 그것이 인권 변호사를 자처해온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철학 아니던가.

오는 9일 광화문에 차벽을 또 세울 거라고 한다. 이는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국민의 집회와 시위 자유를 제한하는 처사다. 경찰은 도심 집회를 10인 이내로 제한한다지만, 10인 이내라는 기준 자체가 합리성이 없다.

‘추미애 일가 의혹’과 북한에 의한 우리 공무원 피살 사건 등으로 이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차벽을 쌓아 정당한 국민의 목소리를 억누르려고 하다가는 역효과만 생길 것이다.

국민과 정부 사이에 차벽을 세우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오히려 국민과의 거리를 없애고 비판적인 시민들과의 소통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것이 민주정부의 올바른 태도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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