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유학생 인종차별' 이후 반 년.."기소조차 못 해"

강푸른 2020. 10. 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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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유학생 인종차별, 獨 6개월째 ‘수사 중’

‘독일 유학생 부부 인종차별 사건’,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유럽에서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됐던 올해 4월, 베를린 지하철 안에서 한국인 유학생 부부가 5명의 현지 청년들에게 인종차별적 모욕과 폭행을 당했습니다.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학생 부부를 ‘코로나’라고 부르며 온갖 희롱을 이어가는 모습이 부부가 촬영한 휴대전화 영상 속에 담겼고, 영상을 본 많은 이들이 제 일처럼 분노했습니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사건은 어떻게 처리됐을까? 베를린에서 여전히 지내고 있는 남편 이 모 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요새 그 일을 별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지난달 초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긴 했지만, 가해자들이 실제로 기소가 될지는 불분명하다고 했습니다. 먼저 사건을 맡았던 베를린 경찰은 처음부터 수사 의지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도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처음에는 베를린에서 제일 큰 신문사에서 대서특필했어요. 담당 수사관 면담이 이례적으로 빨리 이뤄진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점차 관심이 사라지면서, 용의자 특정과 사진 대조 등 수사 단계를 밟을 때마다 매번 한 달씩 걸리더라고요. 나중에는 담당 수사관이 1달 간 휴가를 가 버리는 바람에 연락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수사를 열심히 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요.”


사건 직후 이 씨 부부가 찍은 사진에는 무릎과 손목에 든 멍 자국이 선명합니다. 영상을 찍는 이 씨 부부를 가해자들이 거칠게 제지하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들입니다. 베를린에서 4년 반 동안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이렇게 강도 높은 인종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이 씨 설명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대중교통을 타게 되면 그때 생각이 나서 불안해요.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거죠. 아내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는데, 상담사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라는 식의 말만 해서 그만뒀어요.”

코로나 관련 욕설·폭행…재외공관 35건 신고 접수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많은 동양인은 이 씨 부부처럼 인종차별과 혐오범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단 15주 동안 미국에서 발생한 아시아계 인종차별 사건만 2천여 건이 넘는다는 뉴욕타임스의 보도도 있었는데요. 우리 교민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전해철 의원실이 재외공관을 대상으로 파악한 자료를 보면, 전세계 15개 국가에서 모두 35건의 코로나 관련 인종차별 피해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독일이 9건으로 가장 많았고, 미국이 7건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피해 유형 중에는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식의 욕설과 함께 폭행을 가한 경우가 15건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인종차별 욕설이나 조롱은 대개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점을 고려하면, 실제 피해 사례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안 따라 영사 조력, 체계적 대응책 미비

문제는 우리 공관에 혐오 범죄에 대응하는 기준이나 공통된 매뉴얼이 없다는 점입니다. 사안에 따라 그때그때 영사 조력을 제공하는데, 비슷한 사안에도 대처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인종차별 ‘욕설’ 신고를 받은 한 공관은 엄정하고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는 서한 등을 경찰에 보냈지만, 다른 공관은 인종차별 ‘조롱’을 들은 교민에게 현지 경찰 신고 시스템을 알려줬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씨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주독일 한국대사관 측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 접수에 미온적이었던 경찰은 담당 영사와 통화한 뒤 태도가 달라졌고, 담당 수사관을 만나러 갈 때도 담당 영사와 대사관 자문 변호사가 동석했습니다. 사회생활 경험도, 쓸 수 있는 돈도 많지 않은 유학생 처지에서 이런 도움 없이 혼자서 현지 경찰을 상대하는 건 훨씬 더 어려웠을 겁니다.

“규정상 현지 사법기관에 우리 대사관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주독 한국 대사관 측에서는 자국민 보호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죠. 이번 일을 가이드라인으로 만들어서 각국 영사관에서 숙지하면 저 같은 유학생은 물론 교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이 씨는 또 비슷한 일을 겪은 우리 교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들 꿈이 있어서 해외에 나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이런 일(인종차별)로 좌절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인종차별은 절대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고, 자기 자신을 너무 깎아 먹지 않도록 하셨으면 좋겠어요.”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사태 속에, 동양인 혐오라는 또 하나의 부담을 짊어지게 된 우리 교민들을 위해 정부도 더욱 세심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강푸른 기자 (strongblu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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