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도쿄 근교 타운, 곧 닥칠 우리 미래

2020. 10. 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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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출퇴근, 상상초월 피로
기업이 선호할 만한 매력적인 도시 돼야
구글, 자포스 실험 눈여겨볼 만
과거 해묵은 신도시 구상에서 탈피해야
역사·상업·주거·디자인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런던 킹스 크로스 지역. 19세기 철도 요충지인 이 지역은 2000년대 도시재생 사업인 ‘킹스 크로스 프로젝트’를 통해 활기 넘치는 거리로 탈바꿈했다. 사진 최이규 제공

몇 해 전, 무척 오랜만에 만난 직장 선배와 저녁 자리를 가졌다. 공식적으로는 아이들 키우며 사는 이야기, 일과 정치 이야기를 했다. 비공식적 메뉴에는 물론 두루두루 남녀노소 지인의 근황과 뒷담화 안주가 빠질 수 없었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으로 달리고, 서빙하는 직원이 눈치를 준다. ‘일어날 시간인데’ 생각하면서도 선배의 말을 끊질 못하겠다. 직원에겐 절망스럽게도, 어느새 대화는 학문적 설전으로 바뀌었다. 귀엽게도, 우리는 하는 일에 꽤 심각한 사명감을 공유하는 사이다. 불합리에 탄식하고, 부조리에 분해하며 좋은 사례에 대한 세미나 발표를 이어가다가 선배가 탁자를 탁 치며 일어섰다. “우리 집에 가자!”

캄캄한 강변도로를 달려 도착한 신도시의 고급 아파트. ‘눈치’는 직원에서 형수님으로 바뀐다. 아아…. 선배는 기어이 입가심 맥주 한 상을 내오게 하신다. 결국 세미나는 겨우 마무리되고, 나는 아이 방 작은 침대에 고꾸라져 버렸다. 두어 시간 잠들었을까.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뜬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출근 시간에 늦을 거라며. 그는 어느새 말끔한 슈트를 차려입었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은 눈을 붙이기라도 하는 것인가! 기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주차장으로 내달렸다. 어슴푸레한 새벽 논둑길을 달려 도착한 기차역과 이미 거기에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무척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신도시의 출퇴근 라이프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다. 우리가 어제저녁 늦게까지 서울 시내에서 버틴 이유도 퇴근길 정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따지고 보면, 장시간 통근이 서울만의 문제는 아니다. 뉴욕에서도 맨해튼 시내와 외곽 베드타운을 잇는 버스는 1시간, 때로는 그 이상 걸리기 일쑤다. 하지만, 정원 딸린 단독 주택들이 넓게 흩뿌려진 뉴욕의 교외 지역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신도시들은 초고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교통 인프라가 열악한 단지가 많아 실질적으로 자가용을 대체할 교통수단이 없다. 서구의 신도시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기차선로를 따라 선형으로 발달했지만, 대한민국의 신도시들은 갑자기 어느 순간 지정되고, 기존에 없던 도로나 지하철이 연장됨으로써 모체 도시와 연결을 꾀한다. 그 과정이 마냥 더디고, 순탄할 수 없기 때문에 신도시의 출퇴근 피로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공장 지대를 재생사업을 통해 독특한 상점 등이 들어선 곳으로 바꾼 뉴욕의 첼시 마켓. 사진 최이규 제공

앞으로 교통 인프라가 완비되고, 또 자율주행 시대가 오면 이런 판도는 바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문제는 반대 방향에서 튀어나올 수 있다. 인구 감소에 따른 신도시의 공동화 현상 말이다. 바로 50년 전, 우리나라 신도시가 모델로 삼았던 도쿄 외곽 타마 뉴타운의 상황은 지금 심각하다.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젊은 사람들의 유입은 급격히 줄어 아파트 단지에는 불 켜진 집이 드문드문하다. 장사가 잘되지 않다 보니, 입주자를 찾지 못해 비어있는 상가도 부지기수다. 서울 시내의 주택 수요를 생각한다면 아직 먼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미 비수도권 지역 신도시에서는 신축 아파트의 미분양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3기 신도시 공급 계획이 이미 발표된 마당에 여느 부동산 사무실에 걸려있는 똑같은 모양의 토지이용계획도가 반복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지하철역 주변에 치킨집, 피자집, 학원, 피시방 등이 촘촘하게 똬리 틀고, 그런 식의 상가가 한두 블록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은 전부 회색 아파트 단지가 연속되는 그런 그림 말이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신도시의 근본적 문제는 소위 자족 기능의 결여다. 내 직장이 2시간 거리의 서울 시내가 아니라, 우리 동네에 있다면 출퇴근의 악몽 자체가 필요 없다. 그런데 말처럼 쉽지가 않다. 자족 용지로 마련한 땅에 기업들이 착착 입주해 준다면야 땅 짚고 헤엄치기지만, 왠지 그 땅들은 영 인기가 없다. 예외적으로는 분당 정자역 인근의 네이버와 판교에 들어선 아이티 회사 정도 되겠다. 세제 혜택과 치열한 유치 작전이 동원되기 때문에 어쩌면 기업을 데려오는 데 성공하는 신도시가 더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신도시의 설계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신도시가 자족 기능을 갖출 가능성은 희박하다. 신도시 주민이 원하는 일자리가 소음과 악취, 폐수를 내뿜는 기업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엄청난 수의 기업은 트럭이 다니기도 힘든 산비탈과 계곡으로 들어가 그곳의 자연환경을 송두리째 망치고 있다. 지대가 싼 곳을 찾다 보니 기껏 마련해 둔 공업단지는 비고, 체계적인 도시 계획과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농촌 곳곳이 잠식되는 것이 현실이다.

신도시는 자족 기능 없이 지속하기 어렵다. 자족 기능은 주택이 먼저 생기고, 산업시설이 뒤따라가는 구조에서는 풀기가 어렵다. 신도시 주민이 선호하는 기업은 깨끗한 고부가가치 지식산업이다. 근본적으로 경쟁력 있는 일류 기업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유치가 아닌 유인 정책으로 가야 한다. 다시 말해, 도시 자체의 매력을 키움으로써 관이 나서서 유치하지 않아도 기업들이 선호하는 ‘핫플’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수한 기업일수록 인재를 필요로한다.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 창의적 고급 인력들이 원하고 바라는 곳은 단순하다. 걸어서 재밌는 도시다. 해외의 선두 기업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용해 왔던 외곽의 널찍한 단독 캠퍼스를 버리고, 다운타운과 시티센터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맨해튼의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에 입주한 구글, 그리고 온라인 쇼핑몰 자포스의 최고경영자(ceo)인 토니 셰이가 실험 중인 라스베이거스 다운타운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뉴욕 맨해튼의 가장 힙한 지역인 미트 패킹 디스트릭트에 입주한 구글. 사진 최이규 제공

토니 셰이는 완전히 쇠락한 다운타운의 구 시청 건물을 자포스 본사로 쓰기 위해 접수한 뒤, 주변 도시 자체를 자포스의 기업 캠퍼스로 바꾸기 시작했다. 비어있는 상가에 프랜차이즈가 아닌 미국 곳곳에서 인기 있는 크고 작은 자영업체들을 유치해 도시 자체를 직원 식당, 회사 카페로 만들었다. 스타트업을 유치하고 베가스테크펀드를 만들어 지원하며, 문화시설·학교·병원 등에 투자했다. 단순히 주거냐, 직장이냐 하는 이분법을 벗어나서 직원들이 살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정교한 24시간 도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안전하고 쾌적하게 걸어 다니면서 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타운플랜이다. 컨테이너 파크, 트레일러 파크 등 모든 디테일에는 그의 강렬한 개성이 묻어있다. 그래서 때로는 그를 괴팍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작 다운타운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토니 셰이의 고집스러운 자기 주관이다.

우리 신도시처럼 일산과 분당, 평촌과 김포가 잘 구별되지 않는 획일화된 아파트 경관, 보행이 어려운 대규모의 슈퍼 블록,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원, 자동차 없이는 불편해서 살 수 없는 환경에서는 꿈같은 소리다. 이런 곳에 멋지고, 힙하고, 잘 나가는 기업이 입주할 리 만무하다. 파주출판단지 같은 정반대의 난센스도 있다. 오후 6시가 지나면 단지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정적 지대로 변한다. 직원들은 매일 자유로의 콩나물시루 버스에 시달려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다.

혁신도시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대규모 공기업들이 지방 거점 도시를 외면하고, 엉뚱한 들판에 세워지면서 애초의 균형 발전에 대한 의미와 의도가 반감됐다. 정치적 나눠 먹기의 혐의가 짙다. 도시에 들어선 경우에도 보존해야 할 숲과 농토를 뭉개고 들어서는 바람에 기껏 생명력을 유지하던 구도심을 공동화시키는 부작용을 일으켜 왔다.

이제 해묵은 신도시 구상이 좀 바뀔 때도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똑같은데 말로만 특별함을 외치지 말고, 진정 개성이 넘치는 도시를 만들 때가 됐다. 3기 신도시, 그리고 기존 신도시의 진정한 목적은 단순히 수천 세대, 수만 세대 밀도의 분산이 아니다. 그래서는 절대 서울의 선호 지역과 경쟁해서 이길 수 없고, 목표하는 밀도의 분산도 힘들다. 서울보다 더 매력적이고 촘촘한 도시 구조와 안전하고 활기찬 거리와 아름다운 오픈스페이스, 여가 공간을 통해 고급 인력과 앞서가는 기업이 선호하는 다층적이고 매력적 복합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에는 다 같이 함께 천천히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일본의 저 도시처럼.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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