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헬멧神이 구해줬어요"..33층 주민 업고 뛰어내려간 소방대원들

김준호 기자 2020. 10. 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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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후 11시7분쯤 울산 남구 한 주상복합건물에서 발생한 화재에서 맨꼭대기 33층 입주민 3명을 업고 구조한 네명의 구조대원들. 왼쪽부터 윤한희 소방위, 이정재 소방경, 김호식 소방교, 조재민 소방사. /울산소방본부

“버틸 힘도 없고 뛰어내려야 하는 절망적 순간이었어요. 그 때 헬멧 쓴 神이 나타나 구해줬습니다.”

9일 오전 울산 남구 삼산동 한 호텔 로비. 환자복을 입고 손에 붕대를 감은 이모(20)씨가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은 분이 있다”며 취재진에게 성큼 다가왔다. 이씨는 전날 오후 11시14분쯤 화재가 난 남구 주상복합건물 아르누보의 맨꼭대기 층에 거주하는 입주민이다. 화재 직후 다른 주민 52가구 155명 이웃들과 함께 이날 새벽쯤 호텔로 대피했다. 이씨와 그의 모친, 그리고 이모는 “말 그대로 죽다 살았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씨에 따르면 화재 직후 이들 모녀와 이모는 집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엔 매캐한 냄새와 함께 이미 연기로 자욱했다. 이들은 다시 현관문을 닫고 안방으로 피했다.

이씨는 “워낙 신고 전화가 많은지 119는 연결이 되지 않아 112에 구조요청을 했다”며 “경찰에서는 ‘젖은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대피하라’고 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세 명의 여성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방문 창문을 열어 고개를 빼꼼 내민 채 구조대가 오길 기다리는 것 외엔 없었다.

오랜 시간 창문을 잡고 고개를 내밀고 있던 세 사람은 점점 힘이 빠졌다. 이씨는 “처음엔 ‘조금만 있으면 누군가 구조하러 오겠지’ 했는데, 점점 시간은 흐르고 절망적으로 변했다”며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해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세 사람은 “약 1시간 정도 흘렀던 것 같다”고 길었던 공포의 시간을 떠올렸다.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현관문을 부수고 누군가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이씨는 “'헬멧을 쓴 신(神)인가'하며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며 “정신을 차려보니 소방대원분께서 저를 업고 33층에서 1층까지 내려왔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8일 오후 울산시 남구 한 주상복합아파트에서 난 화재가 9일 오전까지 꺼지지 않고 있다/연합뉴스

이씨가 고마움을 전한 헬멧을 쓴 신이라 불리는 이들은 울산남부소방서 이정재(소방경) 구조대장을 비롯해 윤한희(소방위) 팀장, 김호식(소방교), 조재민(소방사) 구조대원이었다. 피난층인 28층에서 대피한 주민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주민 중 일부가 “33층에도 아직 주민들이 있을 것이다”고 했다.

네사람은 곧장 33층까지 뛰어 올라갔다고 한다. 김호식 대원은 “이미 거실은 불에 타 내려앉아 있는 상태였고 연기도 자욱했다”며 “방안에 사람이 있나 살펴보려고 문을 여니 세 명의 여성이 간신히 숨만 쉬면서 창문쪽에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소방대원들은 즉시 이들에게 호흡보조기를 씌우고 구조에 나섰다. 이씨 등 세 명은 이미 연기도 많이 마셨고,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상태였다. 구조대원들은 1명씩 들쳐 업고 33층에서 1층을 내려갔다.

김 대원은 “무거운 장비에 성인 여성을 업고 내려가는 것이 쉽진 않았다”면서도 “구조대 모두 급박한 상황에 한명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구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초인적인 힘을 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당시 저를 업어줬던 소방대원이 ‘괜찮을거다.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줬던 것이 잊혀지질 않는다”며 “꼭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씨는 이씨의 감사인사를 취재진으로부터 전달받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다. 이씨 뿐만 아니라 모든 입주민들이 별탈 없이 이번 화재사고가 무사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8일 오후 울산의 한 주상복합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한 가운데 아파트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있다./독자제공

이씨 모녀 등과 함께 아르누보 거주 주민들은 인근 호텔에서 머물고 있다. 52가구 155명이다. 주민들은 지인 등과 통화를 하며 울음을 터트리는 등 좀처럼 놀란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다.

아르누보 8층에 거주하는 여모(21)씨는 11시10여분쯤 집안에서 타는 냄새를 맡았다. 여씨는 “냄새만 나고 불꽃은 보이지 않아 다시 방으로 들어갔는데, 타는 냄새가 더욱 나서 거실로 나왔다”며 “거실에 이미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여씨와 가족들은 집안에서 화재가 난 줄 알고 소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연기가 더욱 자욱해지면서 11시17분쯤 소방당국에 신고했다. 여씨는 “소방에 신고하고 나서야 우리 아파트에서 비슷한 신고가 많이 왔다고 하더라”며 “소방관이 ‘빨리 나오세요’라고 해 그제서야 집에서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여씨에 따르면 가족들이 아파트 밖으로 빠져나온 뒤에도 한참 불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약 10분 뒤인 11시28분쯤 주상복합 3층 놀이터 부근에서 불꽃이 치솟으며 불길이 아파트를 따라 순식간에 올라갔다.

이를 전해들은 주민들도 “방송에서 12층이라고 하는데, 3층에서 불이 시작됐다는 말도 있고 해서 정말 헷갈린다”며 “3층 놀이터에서 시작됐다고 하면 방화같은 것도 의심된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은 “12층에서인가 먼저 신고를 하고 소방관이 올 때만해도 아파트 사람들은 인근에서 화재가 난 줄 알 정도로 불꽃이 보이지 않았다”고 거들었다.

이곳 입주자대표 김모씨는 “불을 끌 소방장비도 없으면서 초고층 건물 건축허가는 어떻게 났느냐”며 더딘 화재 진화에 답답해했다.

한편, 남구 주상복합 건물 화재는 전날 오후 11시14분쯤 시작됐다. 건물 전체가 한때 화염에 휩싸일 정도로 크게 번졌다. 소방당국은 사다리차를 동원해 진화에 나섰지만 강한 바람과 고층엔 사다리차가 닿지 않는 등 현장의 애로로 화재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불은 낮 12시35분쯤 초진됐다. 주민 91명이 연기를 마시거나 찰과상을 입었지만 대부분 큰 부상은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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