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들이닥친 까만 연기.."비상계단 더듬어 겨우 탈출했다"

김현종 2020. 10. 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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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했던 화재 순간 
헬기장 입구 잠겼을 때 소방관 도착
주민들 소방관에 고마움 표해
9일 울산시가 남구 삼환아르누보 화재 피해 주민들을 위해 임시 거처로 마련한 호텔 로비에서 피해 주민들이 모여 향후 대책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김현종 기자

9일 울산 남구의 삼환아르누보 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만난 주민 장모(47)씨는 까맣게 탄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며 울먹였다. 이 건물 29층에 사는 그는 전날 오후 11시쯤 방에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던 중 창밖에 불씨가 튀는 걸 보고서야 불이난 걸 알았다고 했다. 당황한 장씨가 현관문을 열자 까만 연기가 집안으로 사정없이 밀려왔다. 장씨는 일단 가족부터 살려야 한단 생각에 겉옷도 못 챙기고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건물을 빠져 나왔다. 그는 "세간살이는 커녕 지갑도 두고 나와 당장 쓸 돈도 없다"며 "목숨 건진 건 감사하지만 당장 어떻게 지내야할지 막막한 심정"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전날 밤 갑작스러운 대형 화재로 한밤중에 다급하게 아파트를 빠져 나온 주민들은 이날 가까스로 진화됐다는 소식에도 안도보단 전날의 악몽을 잊지 못하는 듯 비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는 일단 화재 현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한 호텔에 입주민 159명을 위한 임시 대피소를 마련했다. 하지만 대부분 객실에서 머무르지 않고 화재 현장 소식을 들으려고 도로변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불에 그을린 잠옷이나 병원 환자복을 입은 채 충혈된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주민들도 목격됐다.

이날 소방당국의 노력에도 불길이 계속 이어지던 이날 아침까지 화재 현장 주변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한 주민은 불 난 건물을 소방헬기가 지나 가면서 물을 뿌릴 때마다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허리를 계속해서 굽신거리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불이 타면서 아파트 안에서는 ''펑펑'' 거리는 소리가 잇따라 나오고 검은 연기가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소방당국은 이날 오후 2시 50분쯤 화재 발생 15시여만에 화재가 완전히 진압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긴박했던 전날의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18층 주민 A(48)씨는 “뒤늦게 불이 난 사실을 알고 아이들을 먼저 내보낸 뒤 잠깐 아내를 데리러 집에 들어왔는데 그새 애들이 사라져 있었다”며 “가까스로 1층으로 대피했더니 아이들이 아직 건물에 있다더라.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다리가 덜덜 떨린다”고 말했다. 다행히 불이 크게 번지기 전이어서 A씨는 다시 건물에 진입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21층에 거주하는 70대 남성은 ''11시 반쯤 어두운 비상계단을 더듬어 겨우 탈출했다''면서 ''11층 쯤인가 내려오는데 검은 연기가 가득해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주민들은 화재가 큰 인명피해 없이 마무리된 데 대해 다행이라고 입을 모으면서도 당장 일상 회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걱정부터 쏟아냈다. 4살 아이를 데리고 가까스로 건물을 탈출한 오병규씨는 "아이가 새 환경이 낯선지 계속 울지만 세간이 전부 불타 언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날 호텔 로비에서는 주민 20~30명이 입주민대표를 중심으로 모여 향후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전날 대피 상황에서 발견된 문제점을 두고 분통을 터뜨리는 목소리도 나왔다. 스프링쿨러나 방화벽, 화재 경보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하마터면 '탈출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초고층 건물을 위한 고가사다리가 제때 준비되지 않아 진화가 늦어졌다는 불만도 나왔다. 16층 주민이라고 밝힌 남성은 "층간 방화벽이 완전히 닫히지도 않아 그 틈으로 불씨가 오갔다"며 "화재 경보기조차 제대로 울리지 않는 건물이 어디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입주자 대표인 김성환씨는 "시청에서 33층 건물을 허가 내주면서 사다리차는 52m짜리만 갖고 있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꼬집었다.

이날 화재 현장 주변에서 오전 진압을 마친 한 소방관이 대피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주민들은 거대한 화마가 아파트 전체 건물을 덮치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소방관들의 헌신으로 사망자 발생없이 사고가 마무리됐다며 소방관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18층 주민 김재현(26)씨는 "옥상으로 대피를 했는데 헬기장으로 향하는 문이 잠겨 있어 '꼼짝없이 갇혔구나' 할 때 소방관 10명이 중장비를 메고 올라왔다"며 "소방관들이 주민 약 20명을 앞뒤에서 챙기며 지상으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이어 "20층대에 연기가 굉장히 많았는데 각 층마다 소방관들이 서서 방화벽을 붙잡고 있는 등 혼란 상황을 잡아줘 안심이 됐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시는 이날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남구와 공동으로 현장 상황실을 운영하기로 했다. 또 피해 주민들에게 임시 숙소 마련, 생필품 확보, 보험 관련 법률 상담 등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울산 김현종 기자 be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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