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서울 점령한 마오쩌둥 군대의 중앙청 승전 춤..시진핑 중국몽에 어른거려

박보균 2020. 10. 10.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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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기간 90%가 '항미원조'
마오쩌둥, 전쟁 지휘·연출자였다
'지원군'은 기만, 최정예 부대 출병
밤은 중공군 세상, 매복·포위로
전투기·전차 없이 초반에 미군 눌러
10·25기념일, 한국군 첫 격파한 날
"지평리 졌으면 미군 한반도 철수"
한국의 진짜 복수는 산업화였다
문재인 정권은 중국과 밀착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항미원조 전쟁’ 70돌, 그 진실을 찾아서
중국 단둥 압록강단교의 항미원조 기념조각상. 가운데는 인민지 원군 사령관 펑더화이.
6·25 전쟁은 길다. 3년1개월(1950.6.25~53.7.27). 개막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이다. 그것은 짧은 1막. 10월 19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었다. 긴 2막(33개월)이 열린다. 주역은 미군과 중공군이다. 백선엽 장군의 규정이다. “6·25는 중공군과의 싸움이 거의 전부다. 김일성 군대와의 전쟁은 개전 초 4개월이다.” 그 말은 역사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다. 6·25는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한반도 침공 전쟁이다. 중국의 6·25 호칭은 항미원조(抗美援朝)다.

압록강은 국경이다. 두 개의 단교(斷橋)가 있다. 미군기 폭격으로 끊겼다. 그 속에 역사가 살아 있다. 하나는 단둥(丹東) 압록강 단교. 40㎞ 상류엔 제2의 단교. 장뎬(長甸)의 허커우(河口)단교다. 옛 이름은 청성교. 코로나19 이전이다. 나는 그곳을 다녔다. 제2 단교 주변은 항미원조 역사 전시장이다. 지휘관 사진·깃발·흉상으로 넘친다. 이런 글귀는 타임머신이다. “50년 10월 19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은 세 군데 다리로 압록강을 넘어(跨過·과과) 조선 전쟁터로 갔다.” 그곳은 단둥 압록강철교(→북한 신의주), 청성교(→청성), 지안(集安)철교(→만포진)다.

마오쩌둥
마오(毛) 주석은 전쟁의 지휘·연출자다. 그의 군사 전략·수사학이 쏟아진다. 어휘는 교묘하다. ‘항미원조 보가위국(保家衛國)’-. 미국에 저항, 조선(북한)을 돕고 집과 나라를 지킨다. 말의 생명력은 길다. 2020년 미·중 충돌에 소환된다. 시진핑 주석은 “항미원조는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했다. 10월 25일은 70돌 기념일. ‘항미원조’에서 한국은 생략된다. 가장 큰 전쟁 피해는 한국이다. 유혈·이산의 비극 대부분이 중공군 출현 이후다. 중국은 그 고난을 외면한다. 문재인 정권은 수난을 잊었다. 인민지원(志願)군-. 이미지는 의용군이다. 선전포고에 얽매이지 않는다. 상대의 경계심을 흔든다. 그것은 언어 위장술의 파괴력이다. 마오는 최정예 정규군(인민해방군 4야전군)을 투입했다.

마오쩌둥 “야음 틈타라”- 미군 낌새도 못 채

첫 출진은 13병단(18만 명) 38·39·40·42군(군단급)이다. 지원군 사령원(관)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 11월엔 9병단(12만 명)이 도강했다. 마오의 지시는 야음틈타기다. ‘이동은 황혼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그것은 미군 정찰기의 감시망 피하기다. 차량 전조등이 꺼졌다. 그 많은 무리에 담뱃불도 없다. 그들은 달빛 사이로 숨어들었다. 적유령(狄踰嶺)과 낭림(狼林)산맥이다. 오랑캐가 넘고, 늑대가 있는 험상궂은 곳. 짧은 기간에 30만 대군의 침입이다. 미군은 낌새도 못 챘다. 세계 정보전 사상 최악의 실패다.

샤오산 마오쩌둥기념관의 항미원조 전시물.
그 전야는 이렇다. 후난(湖南)성 샤오산(韶山)에 마오쩌둥 기념관. 항미원조 전시물에 김일성의 구원 요청 편지가 있다. “우리 역량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50년 10월 1일).” 6·25 시작부터 마오는 유비무환의 긴장 상태다. 7월 13일 동북에 13병단을 주둔시켰다. 그의 지정학적 본능이 꿈틀댄다. 그의 말은 수뇌부의 망설임을 평정했다. “미국은 지노호(紙老虎·종이호랑이)다 조선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완충지대다.” 그는 김일성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했다. 1946년 국공내전 때. 북한은 후방기지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변덕이다. 공군 지원 약속은 흐릿해졌다. 마오는 출병을 결심했다(10월 8일).

중공군 장비는 빈약했다. 북한군보다 못하다. T-34 전차, 야크 전투기도 없다. 하지만 중공군은 ‘전쟁 프로’다. “홍군·팔로군으로 대장정·국공내전·중일전쟁에서 단련됐다.”(『중국인이야기』 김명호) 펑더화이는 마오의 전술을 재구성했다. 야간이동·우회·매복·포위·야습이다. 원시와 첨단, 변칙과 정공법의 대결이다. 마오는 한국군을 얕잡아봤다. ‘위군(僞軍·괴뢰군)’으로 불렀다.

그 시절 중공군은 우리에겐 ‘오랑캐’다. 그는 이렇게 지시했다. “처음엔 위군을 집중해 타격하라(專打僞軍). 위군에게 이길 수 있다.”(『항미원조 전쟁 회억(回憶)』 훙쉐즈) 그 경멸적 전략은 집요했다. 휴전 직전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53년 6월 18일) 때다. 마오의 반응은 보복이다. 국군 살상 숫자까지 댔다. “1만여 명을 섬멸(殲滅)하는 것이 극히 필요하다.” 6·25 영웅 백선엽의 회고는 우울하면서 냉정했다. “중공군이 노리는 먹잇감은 늘 우리 국군이었다. 국군은 기록적인 패배에 직면하곤 했다.”(『6·25전쟁 징비록』 정리 유광종)

10월 26일 국군 6사단 2연대 1중대는 환호했다. 그들은 압록강(초산)에 닿았다. 자유통일의 꿈은 악몽으로 바뀐다. 전날인 10월 25일, 평북 운산군 온정리와 양수동. 중공군 첫 전투다. 상대는 국군 6사단 2연대. 40군 118 사단의 매복 공격에 무너졌다. “남조선 군인들이 혼란에 빠져 차에서 내리고 총을 버리고 달아났다.”(『지원군』편집 孫福同·손복동) 118사장(師長·사단장) 덩웨(鄧岳·등악, 32세)는 홍소귀(紅小鬼) 출신. 12세에 대장정에 참가했다. 중국은 그날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정했다. 한국군엔 치욕의 날이다.

마오의 경멸, 한국군부터 섬멸하라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도쿄의 연합군 사령부(정보참모 월로비)는 한심했다. 거대한 적의 준동을 믿지 않았다. 맥아더도 중공군을 깔보았다. 정보 오판과 경적필패(輕敵必敗)가 얽혔다. 펑더화이는 그 오만·방심을 낚아챘다. 구대(口袋·포대자루)의 포위망이 커졌다. 모양은 팔(八)자 거꾸로다.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격이다. 다음날 11월 25일 중공군 2차 전역(戰役·공세)이다. 피리·나팔소리가 울렸다. 어둠속 혼을 뺏는 섬뜩함이다. 덕천의 7사단, 영변의 8사단이 붕괴했다. 두 사단장은 지휘를 포기했다. 서울로 도주했다. 군법 회의에서 중형이다. 사면을 받았다. “한국군 거의가 중공군의 처음 한 방 충격(first shock)에 와해됐다(『콜디스트 윈터』 데이비드 핼버스탬). 워커의 8군은 전면 퇴각했다. 중공군은 보병(소총+수류탄)으로 최강 미군을 격퇴했다. 그것은 마오 전술의 마력이다. 과학은 투혼에 밀린다. 공세적 상상력은 첨단무기를 제압한다.

12월 혹한의 장진호 전투. 미 해병1사단은 중공군 포위망을 돌파했다. 흥남 철수가 가능해졌다. 문 대통령 부모도 피란선을 탔다. 펑더화이는 휴식과 재충천에 나섰다. 중공군 피해는 심각하다. 엄청난 사상자, 보급 파탄. 영양실조. 추위와 동상. 하지만 마오는 38선 남하를 지시했다. 12월 23일 워커 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후임은 매슈 리지웨이 중장. 12월 31일 중공군 공격이 재개됐다. 1월 4일 39군을 선두로 50군, 북한군 1군단이 서울을 점령했다.

마오, 청일전쟁 패배의 아픔 57년 만에 풀어

1951년 1월 4일 옛 중앙청 앞.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주력 39군 116사단)이 환호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그 풍광을 추적했다. "116사단은 한성(漢城·서울)의 독립문을 지났다. 부대원들은 외쳤다. 이승만 소굴(老窩·노와)을 부수자. 오후 4시 총통부를 점거했다.”(『한성쟁탈전』 편저자 殷力·은력) 총통부는 경무대(지금 청와대)다. 그들은 중앙청에서 춤췄다. 사진은 시각적 충격이다(중앙청·청와대 본관, 95년 철거).
허커우단교에 걸린 ‘39軍(군) 116師(사)’ 깃발, 왼쪽은 항미원조 기념일의 40군 118사단기.
116사단장(師長·사장)은 왕양(汪洋·30세)-. 그는 경무대 본관에 들어갔다. "1층은 객청(客廳·응접실),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2층은 침실, 3층은 다다미방이며 1백여 점의 의복·신발이 놓여 있다.”(중국 『매일두조』 사이트) 경무대가 짓밟힌 순간이다. 나는 허커우단교를 오갔다. 끊긴 다리 건너는 북한땅. 난간엔 수십 개의 인민지원군 홍색 깃발이다. ‘39軍(군) 116師(사)’ 깃발이 펄럭인다. 그 아래 강물이 보인다. 압록(鴨綠)의 초록 물색은 처연해진다.
1·4후퇴의 고통. 얼어붙은 한강변에서 어린이들이 울고 있다. [중앙포토]
5일 베이징 천안문광장은 승전 축하 행사다. 군중은 열광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다. 청나라(중국) 군대는 조선에 진주했다. 위안스카이는 총독이었다. 청일전쟁(1894년)에서 중국은 참패·철수했다. 그 후 한반도 종주권 회복은 중국의 비원(悲願)이다. 57년 뒤 마오는 자기 방식으로 그걸 풀었다. 시진핑의 중국몽(夢)은 그 염원을 계승한다. 그날 김일성은 평양과 서울에서 24발의 축포를 쏘았다. 1·4후퇴를 알아야 한다. 마오의 한반도 무력 진입 의도가 간파된다. 서울의 함락, 적(敵) 치하는 두 번째. 서울시민(전체 140만 명) 대다수가 피란길에 나섰다. 고통스러운 체험 때문이다. 그것은 북한군 치하에서 인민재판·납북. 9·28 이후엔 부역자 색출이다.
지평리 전적비에 ’116사단 등을 격퇴했다“고 적혀 있다.
리지웨이는 적의 장단점을 파악했다. 중공군 공세 주기 7~10일. 그것은 병참·보급의 약점 탓이다. 2월 13일 지평리(양평) 전투다. 주역은 프리먼 미2사단 23연대장, 몽클라 프랑스군 대대장. 그들은 원형 진지를 사수했다. 중공군 포위·야습의 필승 전술이 깨졌다. 나는 지평리에서 전적비를 읽었다. 39군 116사단이 적혀 있다. 116 숫자는 유괘하게 살아 움직인다. 김희철 예비역 소장은 단언한다. "지평리에서 졌으면 미군은 철수했다. 한국은 중국 주도로 공산화됐을 것이다.” 3월 15일 백선엽 1사단은 서울을 재탈환했다.1952년 전선은 교착됐다. 마오의 ‘변타변담(邊打邊談)’ 지구전이다. 정전회담과 고지쟁탈전(진지전)의 지루한 병행·반복이다(도표 참조).
허커우단교 광장에 마오안잉(毛岸英) 동상. 앞은 박보균 대기자. [중앙포토]
한국의 진정한 복수는 산업화다. 마오의 문화대혁명(1966~76)은 광기(狂氣)다. 그 10년간 박정희의 산업화가 성취됐다. 88 서울올림픽 전후~ 97년 IMF 외환위기 때다. 그 10년간 한국인은 중국을 무시했다. 수천 년 만의 첫 체험이다. 그 장면은 사라졌다. 문재인 정권의 외교는 중국 밀착이다. 중화(中華)의 항미원조 찬가는 커진다. 마오가 연출한 6·25전쟁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 인해전술은‘선택과 집중’… 야만적 공격 아니다

인해전술
‘인해(人海)전술’은 중공군 이미지다. 사람이 거친 파도로 몰려온다. 그 인상은 야만과 원시다. 압도적 병력, 인명경시, 무지막지다. 실상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과 집중이다. 중공군 공격 패턴은 은폐·매복·유인이다. 포위망 형성 뒤 야습. 피리·나팔·북소리는 심리전이다. 어둠 속 유령이 오는 듯하다. 상대편은 공황상태다. 공포의 전염은 빠르다. 중공군이 쏟아져 온다. 인해전술은 마지막 집중 단계다(왼쪽 사진). 국군은 형편없이 당했다. 초반 3개월간 중공군 전술은 불패다. 그 무렵 중공군 숫자는 30만여 명. 연합군과 병력 차이는 크지 않았다(후반엔 중공군 1백만 명 수준). 한국군 패인 분석은 부끄러운 변명이다. “적의 인해전술, 아군의 병력 부족 탓이다.” 백선엽 장군은 정리했다. “인해전술은 중공군의 특징이 아니다. 그들 전술은 체계와 노림수가 뚜렷했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인해전술에 대한 기억은 과장과 오해다. 하지만 지금도 상식으로 통용된다. 전쟁 기록은 엄정해야 한다. 그래야 교훈으로 전수된다.

51년 1월 펑더화이의 공격은 37도선에서 멈췄다. 김일성은 반발했다. 둘 사이는 험악해졌다. 종전 후 중국은 군 계급제를 시행했다. 펑(彭)은 ‘10원수’의 서열 두 번째. 50년대 대약진운동은 대실패다. 펑의 비판은 직설이다. 마오쩌둥 주석은 분노했다. 펑은 국방부장에서 해임됐다. 60년대 문화대혁명 시절. 이제 그는 ‘반당(反黨)분자’다. 홍위병의 조리돌림에 당했다(오른쪽 사진). 그는 항미원조 최고 공신. 최후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비참함이다. 마오의 권력 운영은 냉혹했다.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펑더화이의 비서(러시아어 통역)로 (10월 23일) 참전. 11월 25일 미 전투기의 사령부(대유동 폐광촌) 폭격으로 숨졌다(28세). 마오쩌둥은 “시신을 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의 무덤은 평남 회창.



단둥·베이징·샤오산(중국)=글·사진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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