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기자 "이런 건 평양서도 못본 장면.. 말 그대로 미쳤다"

조유미 기자 2020. 10. 1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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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봉쇄] 광화문 이번엔 '펜스 장벽'

“회사 출근은 해야 할 거 아니에요.”

한글날인 9일 오전 10시 50분쯤, 서울 광화문 인근 지하철 출구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7번 출구였다. 30대 여성 한 명 앞을 경찰관 7명이 막고 서서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경찰이 도심 내 직장 근무자임을 증명하라며 그 여성에게 “사원증 같은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여성이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 여성은 “여기서 200여m 떨어진 변호사 회관 뒤편에 회사가 있다. 집회가 아니라 회사에 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경찰은 “통제 중이라 지나갈 수 없다”고 제지했다. 그리고는 “차벽을 지나 크게 돌라”며 1㎞ 정도인 우회 루트를 안내했다. 여성은 “회사가 저 앞인데 왜 그렇게 멀리 돌아가라는 것이냐”며 항의했다. 3분여간 승강이 끝에 결국 여자 경찰관이 “제가 회사까지 안내하겠다”며 그 여성을 이끌었다. 여성은 경찰을 따라가면서도 분이 안 풀리는 듯 “출근은 해야 할 거 아니에요!”라고 소리쳤다.

사진 / 한글날인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차벽과 펜스가 설치되어 있는 가운데 세종대왕 동상 인근에서 경찰들이 근무를 서고 있다. 2020.10.9. / 고운호 기자

이날 서울 광화문 세종로 일대는 이른바 ‘재인 산성’으로 둘러싸였다. 경찰은 광장 일대 도로변에 버스 500여 대로 촘촘히 차벽(車壁)을 쳤고, 인도는 철제 펜스 1만여 개로 아예 틀어막거나 꼬불꼬불 미로(迷路)식 통행로를 만들어 놨다. 그나마도 이를 지나려는 사람에겐 어김없이 경찰이 막아서서 “무슨 용건이냐”며 신분증을 요구했다. 군사 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대학가 불심검문이 그대로 재현됐다. 그러나 그때도 인도를 철제 펜스로 막고 미로를 만들어 놓지는 않았다.

한글날 광화문 일대 봉쇄를 경험한 한 외신 기자는 “평양의 군사 퍼레이드도 두 번 가봤는데 이런 건 처음 본다”고 했다. 북한 전문 매체 ‘NK뉴스’를 운영하는 채드 오 캐롤(Chad O' Carroll) 코리아리스크그룹 대표는 이날 소셜미디어에 “점심을 먹으러 빵집에 가는데 경찰 검문을 4번 받았다”며 “지금 서울은 완전히 우스꽝스럽다(ridiculous)”고 했다. “미쳤다(insane)”고도 했다.

한글날, 펜스에 갇힌 세종대왕 - 한글날인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을 겹겹이 에워싼 철제 펜스 옆으로 마스크를 쓴 경찰관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은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상 근처로 접근하는 것이 금지됐다. 경찰은 이날 광화문광장 일대에 경찰관 1만2000명을 배치해 시민들의 통행을 제한했다. /장련성 기자

경찰은 “세종로 일대는 차벽으로 차단했지만 개천절 때와는 달리 광화문 광장까지 이중으로 차벽으로 둘러싸진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광장으로 접근하는 모든 통로 출입구를 막았고, 버스 대신 철제 펜스로 광장을 둘러싼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글날, 시민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광장 중앙의 세종대왕상이 유난히 덩그렇게 보였다.

시내 곳곳에선 시민들이 경찰과 마찰을 빚었다. 오후 1시 55분쯤 종로구 새문안교회 앞에서는 40대 남성이 경찰을 향해 “건너편 교보빌딩 사무실에 가야 하는데 왜 못 가게 막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경찰이 “셔틀버스를 타지 않으면 반대 방향으로 건너갈 수 없다”고 안내했다. 경찰은 이날 종로~율곡로 구간을 오가는 셔틀버스 4대를 배치해 운영했다. 이 남성은 “걸어가면 5분인데 셔틀버스를 왜 타야 하느냐”며 “밀폐된 공간인 버스가 더 위험한데 진짜 방역을 위한 것이 맞느냐”고 반문했다.

광화문역도 통제 - 한글날인 9일 서울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출구 중 광화문광장 방향 출입구 7곳이 폐쇄됐다. /연합뉴스

이날 경찰관에게 통행을 제지당한 시민들은 “광장을 봉쇄하고 통행을 차단한 것이 진짜 코로나 방역 때문이 맞느냐”고 의문을 표시했다. 실제로 이날 오후 3시쯤 광화문 전철역에서 100m 남짓 떨어진 S타워 지상 주차장에선 출연자와 스태프 50여 명이 드라마 ‘스타트업’ 촬영에 한창이었다. 이 중 마스크를 쓴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경찰 관계자는 “우리는 집회를 차단하는 것”이라며 “드라마 촬영이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되면 서울시에서 규제나 방역 지도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광화문 봉쇄의 목적이 코로나 방역에 있다기보다는 오로지 집회 자체를 차단하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인근 상인들은 “손님이 오겠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광화문에서 쌀국수집을 운영하는 전지은 점장은 “매장 테이블이 50개가 넘는데 오늘 손님 1팀 받아서 5만원어치밖에 못 팔았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2시쯤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 앞에서는 7명이 ‘정치방역·서민경제 파탄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앞을 경찰관 30여 명이 막아섰다. 참가자들은 회견을 마치고 “정치 방역 규탄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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