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노동법은 공장노동 시대의 '공장법'.. 박물관에 들어갔어야"

최보식 선임기자 2020. 10. 1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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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
문재인, 젊은 날 인식 수준에 머물러

“지금 노동법은 공장 노동 시대의 ‘공장법’이다. 박물관에 벌써 들어갔어야 했다. 그럼에도 현 정권은 노동 개혁의 ‘개’자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국가 장래를 전혀 생각 않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말들이 잠시 오갈 때, 박지순(54)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을 만났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에서 노동법을 전공한 그는 현재 노동법이론실무학회 회장도 맡고 있다.

“우리 노동법은 9시 출근, 6시 퇴근, 연장야간 근로를 기반으로 해왔다. 직장에서의 보상 체계도 출근한 직원들의 ‘충성적’ 요소가 높이 평가됐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기존의 노동 시간과 장소, 방식이 모두 해체되고 있다. 온라인 중개 플랫폼을 통한 배달, 대리운전, 가사도우미, 간병, 청소 등 다양한 고용 형태가 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제조업 시대에 만들어진 ‘공장법’에 묶여 있다.”

1953년 노동법

―하지만 여당은 노동법 개정 논의를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원천 봉쇄했는데?

“정부가 코로나 상황에서 공공의대 설립을 꺼낸 것은 적절한 시점이었나. ‘경제 3법’이라는 기업 규제법은 지금 상황에서 맞나. 경제 난관을 돌파하려는 기업을 등 뒤에서 칼 꽂는 것과 같다. 그런 걸 하면서 왜 노동 개혁은 말하면 안 되는가.”

박지순 교수는 “문재인 정권은 노동계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을까 겁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이낙연 대표는 “이런 시기에 해고를 쉽게 하고 임금을 유연하게 하자는 것은 노동자들께 너무도 가혹한 메시지”라고 했다. 이런 측면도 있지 않나?"

노동 개혁을 말하면 ‘쉬운 해고’라는 프레임을 덮어씌운다. ‘해고 문제’는 일단 빼도 좋다. 대신 근로시간 자율화, 파견제, 임금체계 개선 등에 노조가 동의해줘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경제 위기의 돌파구를 열어주는 쪽은 노조였다. 노조가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타협을 해왔다."

―야당도 정말 노동법 개정 의지를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여당의 ‘경제 3법 개정’에 동의했다가 비판 여론이 있자 꺼낸 카드로 볼 수 있다.

“야당의 진짜 의도가 어디에 있든, 지금 노동법은 1953년 만들어진 것이다. 정시 출퇴근에 획일화된 굴뚝 산업의 노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노동법이 제정된 것은 6·25 전시(戰時) 상황의 임시 수도 부산에서였는데?

“미국 공정근로기준법과 일본 노동기준법에서 노동자에게 유리한 조항을 뽑아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에서 이런 노동법이 만들어진 게 이상할 정도다. 노동자 천국으로 선전하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염두에 뒀는지 모른다. 사실 그때는 하역 노동자 외에는 이렇다 할 산업 노동자가 없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지주와 자산가 계열의 한민당에 대해 ‘양반 사대주의자’라며 맞섰다. 그는 ‘자유당’을 창당할 때 노동자·농민을 위한 정당을 생각했다. 아마 그런 연장선에서 노동법이 만들어진 것 같은데?

“문제는 그때 노동법이 70년 가까이 지났으나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8년 외환 위기를 맞아 IMF 구제 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어쩔 수 없이 파견제나 유연시간제 등 몇몇 조항이 바뀌었다. 하지만 사업장에서는 별로 실효성이 없었다. 가령 파견 업무는 제조업을 제외한 32개 업무에 한해서만 허용해줬다. 이게 현실에서는 안 맞았다.”

―사용자가 파견제를 정규직 대체 수단으로 쓴다고 노동계는 반대해왔는데?

“기업의 효율과 국제경쟁력에서도 봐야 한다. 신규 자동차를 생산하려면 처음에는 ‘파일럿(시험 가동)’으로 해야 한다. 먼저 사업의 성패를 가늠해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파견임시직으로 해야지, 본대인 정규직을 투입할 수 없다. 다른 나라에서도 모두 비정규직이다. 우리는 이를 법으로 막아놓으니, 그동안 ‘사내 하청’ 편법을 써오다가 현 정권에서 직접 고용 압력을 받게 됐다. 얼마 전 노동부가 GM 군산공장에 그런 지시를 했다고 한다. 그 공장이 경영난으로 2년 전에 문 닫은 사실조차 몰랐던 것 같다.”

―일과 삶의 조화라는 명분을 내건 ‘주 52시간제’도 현장에서는 여러 문제를 낳고 있는데?

“일본은 연간 단위로 연장근로시간 총량 720시간을 주고는 사업장마다 알아서 써라는 식이다. 우리는 법정근로 주 40시간에 연장근로 12시간을 못 넘게 해놓았다. 사업장에서는 일이 몰릴 때도 있고 한가할 때도 있는 것이다.”

―아예 근원적으로 이런 근무시간을 지킬 수 없는 직업들도 똑같은 규제를 받고 있다.

“연간 전체 근로시간 총량만 정해 놓고, 사업장 자율에 맡기면 되는 것이다. IMF 시기에 도입된 선택근로제나 탄력근로제도 유럽에서는 통상 1년 단위로 하는 정산 기간을 우리는 각각 1개월과 3개월로 한정했다. 기업으로서는 근무시간 계산을 맞춰야 하는 업무만 늘어나 실효성이 없었다.”

―노조의 탄력근로제 반대 이유는 연장근로수당 등이 사라져 실질적인 임금 삭감이 되기 때문인데?

“사측에서 상응한 임금 보전을 해줄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동안 사업장에서 일이 없을 때 빈둥빈둥 놀아도 월급이 나왔다. 현대차 사업장에서는 ‘두 발 뛰기’ ‘세 발 뛰기’라며 묶음 작업을 행해왔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한 것이다. 노조 간부 등 어떤 이들은 일 안 하고 급여를 받았을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

노동 존중과 노조 세상

―회사로서는 노조와 좋게 지내기 위해 눈감아준 셈인데?

“사업장 안에서는 젊은 직원들의 불만이 높았다. 왜 자신이 이런 ‘꼰대’들을 먹여 살려야 하나. 그럼에도 회사가 강성 노조의 눈치를 보고 묵인해왔던 것이다.”

/박상훈 기자

―대기업·공기업 노조가 사실상 노동계 전체의 대표 발언권을 갖고 있는데, 과연 이는 정당한가?

“300인 이하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은 2% 미만이다. 100인 이하 사업장은 0.6%밖에 안 된다. 현 노조 세력이 누구를 대변하는지 말해준다. 좋은 직장 다니는 이들의 기득권만 지키는 것이다. 가령 대기업 중심의 노총이 주 52시간제를 밀어붙일 때, 일 더 하고 돈 더 받길 원하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소외됐다.”

―현대차 등에서는 연례 행사처럼 파업이 있어왔다. 노조 파업이 없는 해가 ‘뉴스’가 될 정도였다. 노조가 파업 무기를 들이대면 사측에서는 마땅한 대응 수단이 현실적으로 없는데?

“노동법에는 ‘파업 시 대체 근로를 허용하지 않는 조항’이 있다. 이런 노동법 조항은 OECD 회원국 중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일부 단체협약에는 ‘쟁의행위 중 조합원 징계 절대 불가’ 조항도 있다. 경영이 어려워 구조조정을 하려고 해도 노조 동의 없이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노조 전통이 오래된 유럽 국가는 어떤가?

“프랑스나 독일 등은 외부 대체 인력을 일부 허용한다. 미국은 파업권과의 형평 차원에서 외부 인력을 투입할 수 있다. 일본 역시 파업 시 대체 근로를 허용한다. 대기업이 지배구조와 투명성 등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야 하듯이 노동 부문도 그렇게 가야 한다. 우리 노동법 경쟁력은 국제무대에서 너무 뒤처져있다.”

―재벌 개혁은 어떤 식으로든 진행돼왔다. 국가 장래를 위해 정말 개혁이 필요한 쪽은 공공 부문과 노동 부문인데?

“전문가들 대다수가 이 점에 동의한다. 노동 개혁은 그래도 노조를 설득할 수 있는 진보 정부가 더 잘 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슈뢰더 총리의 사민당 정권이 노동 개혁을 이뤄냈다. 물론 그 개혁으로 슈뢰더 총리는 다음 총선에서 패배해 정권을 내놓아야 했다. 과거 네덜란드에서도 노총위원장 출신인 빔 콕 총리가 노동 개혁을 단행했다.”

―역대 정권은 비록 불발로 끝났지만 노동 개혁 시도는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노동 개혁을 지금까지 한 번도 입에 올린 적 없는데?

“노조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출범했으니까. 줄곧 ‘노동 존중’만 말했지 개혁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다. 이 정권은 노동계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을까 봐 겁내는 것이다.”

―현 정권에서 ‘노조 세상’이 됐다는 말이 나온다. 양대 노총은 서로 선명 투쟁을 경쟁하는 양상인데?

“마치 투쟁이 노조의 존재 이유처럼 됐다. 사측과의 교섭 테이블에서 타협·양보한 노조지도부는 여지없이 탄핵됐다. 이 때문에 노조는 협상에서 사측이 못 받아들일 요구 사항만 쏟아내는 식이었다.”

―정치권은 표를 의식해 노동계에 영합해왔다. 특히 민노총은 누구도 건드리기 어려운 ‘언터처블(untouchable)’ 지위를 누리고 있다.

“정치지도자라면 국가 장래를 위해 노조 세력과도 맞붙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

전략적 미스

―문 대통령이나 정권 실세들은 여전히 ‘노동자는 사회적 약자’라는 시각을 갖고 있는데?

“대통령이나 586 정치인들은 젊은 날 노동 문제를 ‘인권 문제’로 봤던 인식 수준에 머물러있다. 과거에는 맞았는지 모르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지금은 노동을 경제나 일자리와 연계된 시장의 문제로 봐야 한다. 기업이 잘 돌아가도록 해줘야 고용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국가 경제 경쟁력 저하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고 노동 개혁에 나섰다가 실패했는데?

“2015년 노동 개혁이 총론에서 거의 합의됐다. 노사정이 성과연봉제·파견제도 개선 등과 관련된 합의문에 서명했다. 하지만 각론에서 정부가 ‘통상해고’를 너무 밀어붙였다. 이게 전략적 미스였다고 본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사업장별로 협상하면 됐는데…. 가뜩이나 합의문으로 노동계 내부 압박을 받던 노조 대표에게 판을 깨버리고 뛰쳐나가는 빌미를 줬다.”

―그때 노동 개혁 실패가 박근혜 정부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있는데?

“노동계가 완전히 반(反)정부 세력으로 돌아서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의 중심축이 됐다. 노동 개혁도 날아가고 박근혜 정부도 날아갔던 셈이다. 당시 서명한 합의문은 휴지 쪼가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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