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에 이런 조각이?..태조 왕건의 스승을 새기다

김석 2020. 10. 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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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술을 대표하는 장르는 아시다시피 '조각'입니다. 미술사학자 양정무 교수가 그리스․로마의 문명과 미술을 다룬 《난생처음 한 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제2권에서 상찬해 마지않았던 것처럼, 고대 그리스의 조각은 "운동감으로 보든 인체 표현으로 보든" 세계 조각사에 길이 남을 명품으로 꼽힙니다. 다만 안타까운 건 그리스 조각의 원본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죠. 세계의 유명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조각품들은 대부분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입니다. 세계미술사에서 적어도 조각에 관한 한 그리스와 로마가 한 데 묶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그리스 조각에도 구체적인 개인을 새긴 이른바 '초상 조각'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사람은 몰라도 산 사람의 얼굴을 새기는 전통은 그리스에는 없었다는 겁니다. 양정무 교수는 이런 전통이 그리스 특유의 민주주의가 낳은 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가 잘 유지되려면 특출한 개인이 인기를 독차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믿었다는 거죠. 쉽게 말해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큰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조각이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는 겁니다. 물론 전혀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요.

(좌)밀로의 비너스, 기원전 130~100년, 루브르박물관 (우)조상의 흉상을 들고 있는 로마의 귀족, 1세기경, 카피톨리노박물관


반면 로마인들은 초상 조각을 만드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신분이 높지 않은 사람들의 초상 조각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고 하죠. 그리스의 미적 전통을 확고하게 계승한 로마가 그리스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누구나 한번은 찾아보게 되는 저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의 인체 표현은 신의 형상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오른쪽에 있는 어느 로마 귀족의 조각상을 보면 돌덩이에서 당장이라도 툭 튀어나올 듯 인물 표현에 생동감이 넘쳐흐르죠. 2,000년 전 로마 조각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콘스탄티누스 거상, 313년, 카피톨리노박물관


자, 이쯤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궁금증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미술은 어떨까? 한국 미술의 유구한 전통에도 과연 '초상 조각'이 있었을까? 한 인물의 개성이 오롯이 살아 있는, 진정한 의미의 초상 조각이 한 점이라도 남아 있는 게 있을까? 돌이켜 보면 아주 머나먼 고대로부터 조선 시대까지 조각은 끊임없이 만들어졌습니다. 돌을 깎아 만든 것도 있고, 나무를 깎아 만든 것도 있죠. 청동이나 금속으로 주조한 것도 물론 꽤 있고요. 우리 고미술을 대표하는 조각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부처입니다. 불상이죠. 동아시아 전통 조각을 대표하는 것은 불상입니다. 모든 불상은 원론적으로 다 다릅니다. 석가모니의 모습을 똑같이 새기지 않는 이상, 불상의 형상이 제각각인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그런 차이를 개성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불상을 만든 뜻은 순전히 종교적인 목적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처님이 다 달라도, 끝내 부처님은 부처님일 뿐. 불상만큼이나 많이 만들어진 보살상이나 나한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조각들은 특정한 인물의 개성을 담은 것이 아니죠.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희랑대사상, 고려 10세기, 건칠과 나무에 채색, 높이 82.4cm, 합천 해인사


그런 상식을 여지없이 깨는 단 하나의 조각을 대면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지난해 초 국립중앙박물관이 야심차게 마련한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에 공개된 진기한 조각상이 있었죠. 무려 10세기에, 그것도 나무에 색을 입혀 만든 조각이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과 함께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안겼습니다. 주인공은 태조 왕건의 스승이었던 불교 승려 희랑대사(希朗大師)입니다.


82.4cm로 결코 작다고도 할 수 없는 이 조각상 앞에 서서 한동안 멍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무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놀라움은 더 커집니다. 사실감이 가득한 저 눈동자, 미간과 이마와 눈가와 두 볼 아래 주름 하며, 가만히 다문 입술, 심지어 툭 불거져 나온 성대와 빗장뼈까지도 실재 인물의 그것처럼 놀랍도록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조각상의 주위를 빙빙 돌며 앞모습, 옆 모습, 뒷모습까지 샅샅이 눈에 담았죠. 어디서 보아도 가히 충격 그 자체라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희랑대사는 고려 건국 시기에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힘을 보탠 고승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어마어마한 위세를 떨치던 사찰 해인사를 중심으로 활동했죠. 그래서 이 조각상은 지금까지도 해인사에서 대대로 보관해오고 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는 우리 조각 사상 최고의 걸작이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고승 ‘초상 조각’입니다. 이웃 나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입적한 고승을 추모하는 의미로 초상 조각을 활발하게 제작했다고 합니다. 반면 우리의 불교 전통에서 <희랑대사상>은 너무나도 독보적이고도 희귀한 사례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초상 조각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희랑대사상의 가슴에 뚫린 구멍입니다. 다재다능한 작가 곽재식이 엮은 《한국 괴물 백과》를 보면,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지은 <가야산기(伽倻山記)>에서 옮겨온 이런 내용이 보입니다.

"희랑은 한 사람의 칭호로 심성이 관대하고 보통 사람과 다른 신비한 힘이 있다. 특히 가슴 한가운데 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이 몸속까지 연결되어 있다. 얼굴과 손은 까맣고 힘줄과 뼈가 유독 울퉁불퉁 튀어나온 모양이다. 원래 머나먼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신라 시대에 신라로 건너왔다 한다. 이 사람은 해인사의 승려로 지냈는데 천흉승(穿胸僧, 가슴에 구멍이 뚫린 승려)이라 했다."

이 구멍이 어떤 연유로 생겼는지는 지금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어떤 경로로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인해 희랑대사가 전설 속의 인물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한 것은 그만큼 희랑대사가 한 시대를 넘어서는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박지원, 이덕무, 성해응 등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들은 어김없이 이 신비롭기 그지없는 인물의 전설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이 조각상의 얼굴과 손이 까맣다고 묘사했다고 하죠. 그래서 지금 보는 사실적인 채색은 그 이후에 새로 단장하면서 입힌 것으로 추측합니다.


국보 중의 국보죠. 그래서 이 정식 이름이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으로 붙여진 이 조각상은 최근 보물에서 국보로 당당히 승격됐습니다. 우리에게도 자그마치 1,000년 전에 만들어진 이토록 훌륭한 초상 조각이 있다는 사실에 더없이 뿌듯함을 느낍니다. 누군가 우리 전통미술에도 내세울 만한 '초상 조각'이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에겐 <희랑대사상>이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말이죠. 게다가 그 긴 세월에도 조각으로 새겨진 주인공의 모습이 저리도 온전하고 생생하니, 그걸 대대로 고이 지켜온 마음들의 씀씀이를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픽:김현수

김석 기자 (stone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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