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국가보안법이 동아줄인 사람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2020. 10. 13.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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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대놓고 국보법 조롱.. 국보법 핑계 삼아 민주 투사 행세
찬양·고무죄 이미 유명무실.. 좌파는 교묘하게 피해가
거대 여당이 국보법 폐지·개정 언급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2020년 현재 국보법은 대한민국을 지켜주지 못한다. 현실은 정반대다. 국보법을 핑계 삼아 민주투사 행세하는 이들에게 알리바이만 제공해주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일. 노무현재단 이사장 유시민이 김정은에게 ‘계몽 군주’라는 수식어를 헌사했다. 논란이 커지자 그건 칭찬이 아니라고 했지만 앞뒤가 안 맞는다. 더 중요한 내용은 그가 붙인 사족에 있다. 유시민은 “(북한이 개혁을 하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취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고무·선동할 목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고 덧붙였던 것이다.

저기서 ‘고무·선동’이라는 어휘가 사용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감히 국보법을 어겨가며 발언하는 민주화 투사인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하고자 하는 제스처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 시민단체가 유시민을 고발하면서 그의 예언은 실현되고 말았다.

물론 유시민이 국보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것이라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치 그의 누나인 유시춘이 2018년 EBS 이사장에 임명된 후, EBS미디어에서 김정은을 ‘세계 최연소 국가원수’로 소개하는 캐릭터 상품을 발매했지만 큰 탈 없이 지나갔던 것과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권하에서 국보법은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더 중요한 건 현 집권 세력이 국보법을 폐지할 리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국보법은 그들 손에 들려 있는 꽃놀이패이기 때문이다. 법원, 검찰, 경찰, 언론 등 거의 모든 권력기관을 장악했어도 국보법이 있는 한 영원히 피해자 행세를 할 수 있다. 마치 ‘때려봐, 때려봐’ 하며 상대방의 구타를 유발하는 자해 공갈단과도 같다. 그들은 계속 일부러 국보법을 어기고, 처벌받지 않으며, 민주화 투사 행세를 할 것이다.

온갖 비리와 추문이 터져나와도 문재인 정권을 철통 지지하는 이들의 심리 역시 국보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국보법은 절대악이다. 따라서 그 국보법에 의해 탄압받는 세력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않더라도 차선 내지 차악으로서 지지해야 한다. 세상에 이렇게 편리한 알리바이가 또 어디 있을까. 노무현 정권 때도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국보법을 폐지하지 않았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20세기의 국보법에 묶여 있는 사이 북한의 대남 전술은 21세기에 맞게 진화했다. 대체 왜 포털사이트 정치 뉴스에는 한국어를 생뚱맞게 쓰는 사람들이 달아놓은 리플이 종종 보이는 걸까?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북한 등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면 지나치게 격하게 반발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 모두가 우리처럼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가 밝힌 것처럼 러시아는 2016년 대선에서 사이버 공작을 벌였다. 러시아는 미국인이 푸틴을 찬양·고무하도록 유도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에게 유리한 후보로 본 트럼프를 지지하도록 미국의 여론을 몰아갔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공작이 펼쳐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을 찬양하는 우리 국민을 처벌하는 것은 안보적 실익이 없다. 적의 공작 활동은 오히려 우리나라의 정치인을 찬양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을 테니 말이다. 20세기의 찬양·고무죄는 21세기의 안보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2012년 초, 젊은 사진가 박정근은 트위터에서 ‘우리민족끼리’ 계정의 트윗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재판을 통해 드러났다시피 그는 김정일과 북한을 개그 소재로 삼고 있었을 뿐이었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유시민 앞에서는 놀림거리에 불과한 국보법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위협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 불안과 공포가 남아있는 한 다수의 청년, 중도 표심은 보수로 넘어오지 않는다.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자신들이 여전히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재 국보법은 보수가 아니라 진보의 무기다. 더불어민주당만 세도 174석의 거대 여당이지만 폐지나 개정을 언급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보수가 먼저 나서서 국가보안법 중 찬양·고무 행위를 처벌하는 제7조를 폐지해야 한다. 동시에 대북 정보전 대응 체계를 바로잡으며, 특히 일상적 사이버 공작을 차단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갖춰나가야 한다. 국보법 찬양·고무죄는 친여 세력이 매달린 동아줄이다. 반대편의 보수가 먼저 놓아버리면, 낡은 진보는 뒤로 나자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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