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지기춘풍 추미애 / 김태규

김태규 2020. 10. 1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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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법조팀장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1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에서 진행된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9개월이 지난 2018년 2월5일, 신영복 선생이 생전에 썼던 ‘춘풍추상’(春風秋霜) 휘호 복사본을 액자로 만들어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선물했다. ‘춘풍추상’은 중국 명나라 때 인생지침서 <채근담>에 나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줄임말로 “남에게는 봄바람같이 대하되 나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은 그날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공직자가 공직에 있는 동안 이런 자세만 지킨다면 실수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업무 특성상 지나친 온정주의가 독이 될 수 있는 공직이라면? 문 대통령은 검찰·감사원·청와대를 거론하며 “남들에게 추상과 같이 하려면 자신에게는 몇배나 더 추상과 같이 대해야 하며 추상을 넘어서 한겨울 고드름처럼 자신을 대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행사하는 공직자가 항상 가슴속에 새겨놓아야 할 경구다.

한동안 잊었던 ‘춘풍추상’을 떠올려준 사람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다. 추 장관은 지난 8월2일 신임검사 임관식에서 “지기추상 대인춘풍이라는 말이 있다”며 “원칙만을 앞세워 기계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검사가 아니라 소외된 약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함께하며 또 다른 측면은 없는지 살펴보는 혜안을 쌓아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공익의 대변자인 검사로서 첫발을 내딛는 새내기 공직자에게 건넨 적확한 조언이다. 원전의 순서를 뒤바꿔 대인춘풍보다 ‘지기추상’을 앞세운 건 검사 개인의 몸가짐을 더욱 바로잡으라는 당부로 읽혔다.

그런데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인 추 장관 본인은 어떤가. 서울동부지검 수사를 통해 추 장관이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자신의 보좌관에게 아들 부대 지원장교의 전화번호를 건네고, 보좌관으로부터 “지원장교에게 예후를 좀 더 봐야 해서 한번 더 연장해달라고 요청해놓은 상황입니다. 예외적 상황이라 내부검토 후 연락 주기로 했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보좌관에게 ‘(부대에) 전화 걸라고 시킨 사실이 없다’를 명확하게 말씀드린다”고 했던 추 장관 발언의 신빙성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물증이었다.

“검찰 수사를 통해 제가 보좌관에게 전화하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정말 저는 기억하지 못했던 일인데 결과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어서 송구합니다. 군에 간 아들이 건강하게 제대하기만을 바라는 게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엄마 된 입장에서 아픈 아들의 병가·휴가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나서야 했지만 집권여당 대표라는 무거운 자리 때문에 보좌관에게 부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정권 인수 시기였던 당시에 저는 집권당 대표로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군대 보내놓고 바쁜 엄마가 저 하나뿐이겠습니까.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보좌관이 저 대신 아들의 일을 처리하게 했지만, 이렇게 도와줄 보좌관이 없는 대한민국의 엄마들에게는 박탈감을 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 가족 일에 대해 세심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이렇게 진솔한 사과를 바랐지만 현실은 달랐다. 추 장관은 추석 연휴 기간인 지난 10월2일 페이스북에 ‘9개월간의 전말’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아들에게 전달받은 ‘지원장교님’의 전화번호를 전달한 것을 두고 보좌관에 대한 ‘지시’라고 볼 근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 7월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소설 쓰시네”라는 발언으로 야당의 반발을 산 추 장관은 12일 열린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언론이 가세하고 야당이 증폭해온 9개월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고, 소설이 소설로 끝난 게 아니라 장편소설을 쓰려고 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기춘풍. 본인에게 엄격하지 못했고 반성도 없었다.

다시 <채근담>을 훑어보았다. “자기를 반성하는 사람은 닥치는 일마다 모두 약이 되고 남을 탓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마다 모두 창과 칼이 된다.” 옳은 말이다.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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