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감수' 출연자들 자발적 착취가 만든 자기 극복의 가짜 쾌감 '가짜사나이 시즌2' [위근우의 리플레이]

위근우 칼럼니스트 입력 2020. 10. 16. 16:40 수정 2020. 10. 16.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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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맞으며 저체온증에 타박상..높은 수위 훈련받는 이유 불분명

[경향신문]

<가짜사나이 2>는 가학의 정당성을 잘 정당화한다. 훈련 참가자가 자발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구조가 아닌 자신을 탓하는 극단적 능력주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실패는 네 노력 부족’이라는 이 프로그램 담론이 2020년 한국에서 다시 주술적 힘을 발휘한 건 능력주의가 공정 개념을 대신한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은 유튜브 <가짜사나이 2> 예고편 갈무리.

최근 유튜브와 카카오TV 등을 통해 순차적으로 공개 중인 동영상 콘텐츠 <가짜사나이 시즌 2>(이하 <가짜사나이 2>)에 대해 비판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최근 급증한 교관 관련 논란들은 차치하고도)이다. 당장 프로그램 오프닝에서부터 “참가자들의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부담스러워하실 수 있는 분들은 시청에 특별한 주의를 부탁”한다고 할 정도로 그 안에서 진행되는 모든 순간은 너무나 가학적이다. 출연자들은 첫날 새벽 해변에 몸을 뉘어 파도를 맞는 정신력 훈련 중 저체온증에 기절 직전까지 가거나 얼차려 중 약간의 부주의로 심한 타박상을 입기도 한다. 평화연구자인 임재성 변호사는 <가짜사나이 2>에 대해 한겨레 칼럼에서 “당하는 이들이 원한다고 하더라도, 고문과 같은 비인격적 수단을 훈육이나 처벌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순간 문명이 힘겹게 쌓아올린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격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고 온당하게 지적한다. 또한 프로그램 뼈대를 이루는 군사훈련의 모티브로부터 한국 사회 특유의 병영국가 문화 잔재를 읽어낼 수 있다. 연합뉴스 기사에 인용된 정덕현 평론가의 코멘트처럼 “군대 포르노로 소비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가짜사나이 2>에 대한 가학성 비판이 당위적으로 온당할수록, 그 가학성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참가자들의 피학적 욕망과 그에 대해 감동의 자기 극복 서사를 읽어내는 시청자들의 욕망은 불가해하게 남는다. 위에 인용한 연합뉴스 기사는 “왜 높은 수위의 훈련을 받고 있는지, 왜 그 모습을 방송으로 보여줘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한 기획의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가짜사나이 2>가 문제적이고 정말 문제인 건, 가학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정당화해서다.

논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선 가지치기가 필요해 보인다. 지난 시즌까지 포함해 <가짜사나이 2>는 제목의 모티브가 된 병영 체험 프로그램 MBC <진짜사나이>와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다. 병영 체험을 특수부대 체험으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물론 프로그램에 삽입된 인터뷰에서 한 교관은 “특수전 요원이 임무를 수행하는 건 삶과 죽음이 오가는 환경”이기에 “모든 훈련은 극한으로 최악의 상황을 항상 만든다”고 훈련 강도를 정당화한다. 이 말엔 이중의 속임수가 있다. 먼저 첫 번째,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실제 특수 임무에 투입되는 군인이 아니다. 그러니 이 변명은 명백히 구차하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가짜사나이 2>와 병영 체험의 철학적 빈곤함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은 실제 이 프로그램을 지탱하는 담론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다. 여기서 두 번째 속임수가 작동한다. 그들은 특수전 훈련을 가르치기 위해, 혹은 배우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며, 보는 이들 역시 그러하다. 즉 교관의 코멘트는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이 프로그램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전술이다. <가짜사나이 2>의 훈련 프로그램은 유사 군사훈련이 아닌, 참가자들이 자발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구조가 아닌 자신을 탓하는 극단적 능력주의 세계관의 완벽한 알레고리다.

만약 <가짜사나이 2>와 형식과 욕망에 있어 근친적인 콘텐츠를 찾는다면 그것은 <진짜사나이>보단 차라리 <슈퍼스타 K>(특히 시즌 3)부터 최근의 <아이랜드>에 이르는 엠넷 서바이벌 월드에 가까울 것이다. 극한의 경쟁 구도 안에서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결과의 책임을 출연자 개인의 근성과 노력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가령 낮은 평가를 받은 연습생들이 ‘그라운드’라는 일종의 낙오된 공간에서 살게 되는 <아이랜드>에서 진행자 남궁민은 “이들 스스로 선택한 결과가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죠”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가짜사나이 2>에서 방송인 오현민이 첫 훈련 중 다른 출연자의 팔꿈치에 맞는 사고로 각막이 찢어져 훈련 가능 여부를 문의하자 교관은 “묻지 마, 네가 판단해”라고 말한다. 다행히 오현민은 자진 퇴교했지만, 각막이 찢어지게 되는 과정과 혹여 그가 훈련을 지속했을 때 벌어질 문제들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개인의 것으로만 넘어간다. 그럼에도 오현민은 인터뷰에서 “더 멋진 모습을 못 보여드려 그 부분에 대해선 되게 죄송”하다며 “부주의해서 다친” 것을 자책한다. 여기엔 판본만 바뀐 ‘노오력’ 부족의 서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작동한다. 저체온증에 의한 근육 마비 때문에 기어서 훈련에 합류하던 유튜버 윽박이 교관에게 연신 죄송하다고, 할 수 있다고 외치는 모습으로부터 <아이랜드>의 연습생들이 “우리 이제 잠을 줄여야 해요”라고 말하는 자발적 착취의 풍경을 오버랩하기란 어렵지 않다. 열외는 실패고, 실패는 네 노력 부족 때문이라는 오래됐지만 효과적인 담론은 능력주의가 공정 개념을 대신하게 된 2020년의 한국에서 다시 주술적 힘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슈퍼스타 K 3>에서 패자부활을 기다리는 출연자들이 울면서 ‘거위의 꿈’을 부르는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서바이벌 오디션은 그 경쟁에 승리했을 때의 보상을 명확히 제시한다. <가짜사나이 2>는 수십 배 가학적이면서도 그러한 명시적 보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출연자들은 기꺼이 고생을 감수하며, 시청자들은 그 어떤 서바이벌 오디션을 볼 때보다 열광한다. 역설적으로 <가짜사나이 2>는 바로 그 보상이 없기 때문에 노력과 자기 극복의 서사를 더 완벽히 완성하기 때문이다. 시즌 1부터 <가짜사나이> 시청자들이 강하게 반응한 건 ‘진정성’이란 개념이다.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은 시사IN에 기고한 글에서 <가짜사나이 시즌 1>에 대해 “한국은 냉소가 팽배한 사회”이며 “냉소가 깊어질수록 진짜에 대한 갈망도 커지기 때문”에 대중이 열광하는 것이라 분석한다. 어떤 보상이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출연자들에게서 자기 극복의 진정성을 읽어낸다는 것이다. 그는 ‘고문관’ 포지션의 트위치 스트리머 공혁준이 훈련을 통해 자신을 바꿔나가는 모습을 예시로 “‘진짜’가 되기 위한 ‘가짜사나이’들의 분투”를 높게 산다. 하지만 공혁준의 변화하려는 노력이 진짜인 것만큼, 어떤 한 사람을 고문관으로 낙인찍고 비난하는 이들의 비겁함도 진짜이며, 트위치의 수익 모델이 많은 스트리머의 감정노동을 당연시하고 피폐하게 만드는 것도 진짜다. 그럼에도 오직 개인이 겪고 책임지는 고통만이 ‘진짜’로 취급된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그래서 <가짜사나이> 시리즈의 성공 비결은 개인의 서사가 아닌 것을 개인의 서사로 치환했다는 것에 있다. 구조적 착취라는 거대 서사를 개인의 노력과 극복이라는 미시 서사로 대체할 때, 자발적 착취의 메커니즘은 피, 땀, 눈물이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풍경으로 채색된다. 이번 시즌에 출연한 쇼트트랙 선수 곽윤기는 입수 훈련 중 여기 왜 왔느냐는 교관의 다그침에 “끈기 있게 변하고 싶어서, 금메달 따고 싶어서” 왔다고 답했다. 흙탕물에 온몸을 적시고 금메달을 따고 싶다 외치는 절실함은 진짜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개인의 진정성은 구조적 진실을 은폐한다. 곽윤기가 이번 훈련으로 강한 동기를 얻고 정말로 다음 올림픽에 금메달을 딴다면(그는 이미 세계선수권에선 금메달을 땄다) 좋은 일이겠지만, 그가 따지 못하거나 혹은 다른 선수가 금메달을 따지 못하는 것이 절실함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즉 자신을 극복하고 싶다는 출연자들의 진정성이 가학적 훈련 안에서 절절히 증명되고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릴수록, 승자가 승자인 건 그만한 이유가 있으며 패배자는 불만 없이 더 노력해야 한다는 세계관은 더 공고해진다. 하여 <가짜사나이 2>에 대해 우리는 이 가학적 풍경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아닌, 이 가학적 풍경이 정당화되는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오직 자신이 겪는 고통의 크기만으로 진심을 증명받을 수 있는 이 진정성 가득한 지옥에서 우리가 과연 살아갈 수 있고 그래도 되느냐는 문제다. 진정성 있는 지옥이, 지옥이 아닌 건 아니므로.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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