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담] 한밤의 北김정은 "눈물" "사랑", 계몽군주 진심 맞나

윤경환 기자 2020. 10. 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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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환의 국정농담(國政濃談)
"미안하고 고맙다" "사랑하는 남녘 동포" 울먹이다
ICBM엔 '함박웃음'..야간 열병식 '김여정 연출설'
잇딴 '애민 지도자' 행보에도 서방세계 반응 '싸늘'
핵·미사일 앞세워 세습·종신 독재 우선 의지 여전
이 와중에 한미동맹은 균열 징후..서훈, 미국 급파
북한 김정은. /연합뉴스
[서울경제] 지난 10일 북한이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을 처음으로 심야 시간대에 진행한 가운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전례 없는 연설이 한동안 입방아에 올랐다. 김정은은 재난과 관련해 주민들과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미안하고 고맙다”고 울먹이는가 하면 남측을 향해서는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라는 유화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이후에도 연일 태풍 피해 현장을 시찰하며 자신의 애민 정신을 강조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달 25일 비유로 쓴 ‘계몽군주’라는 표현이 다시 한 번 연상되는 장면들이다. 전문가들은 다만 김정은의 이 같은 파격 행보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북 제재, 수해 등 북한의 내부적 3중고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민심 이반을 최대한 막고 내부 결속을 다지고자 하는 목적이 강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정은은 열병식에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등장하자 당당한 미소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주민들의 안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여전히 자신을 중심으로 한 유일·세습·종신 지도 체제의 결사 옹위 역시 중요시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 대목이다. 한 손엔 ‘애민’ ‘애족’을, 한 손엔 ‘핵’ ‘미사일’을 쥔 김정은의 진정성을 우리 정부뿐 아니라 미국의 새 행정부가 얼마나 알아줄 지가 향후 한반도 정세의 최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의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북한군. 이날 열병식에는 코로나19 확진자 ‘0명’을 과시하듯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연합뉴스
“미안하고 고맙다” “사랑하는 남녘 동포” 이례적 눈물 조선중앙TV는 지난 10일 수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개최된 2시간16분 분량의 열병식 영상을 방영했다. 실제 열병식은 이날 자정부터 개최됐지만 영상은 19시간이 지난 이날 오후 7시 공개했다.

이번 열병식은 불꽃놀이, 발광다이오드(LED)가 장착된 전투기 등 어둠 속에서 빛을 활용한 볼거리로 화려하게 연출됐다. 김정은은 시계탑의 시침과 분침이 ‘10일 0시’를 가리키자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을 연상시키는 회색 정장과 넥타이 차림을 하고 극적으로 등장했다.

김정은은 이날 연설에서 “적대 세력들의 지속적으로 가중되는 핵 위협을 포괄하는 모든 위험한 시도들과 위협적 행동들을 억제하고 통제 관리하기 위해 자위적 정당 방위수단으로서의 전쟁억제력을 계속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우리의 전쟁억제력이 결코 남용되거나 절대로 선제적으로 쓰이지는 않겠지만, 만약 그 어떤 세력이든 우리 국가의 안전을 다쳐놓는다면 우리를 겨냥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든다면 나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공격적인 힘을 선제적으로 총동원하여 응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 군사력이 그 누구를 겨냥하게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며 “그 누구를 겨냥해서 우리 전쟁억제력 키우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고 우리 스스로를 지키자고 키우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김정은은 또 “가혹하고 장기적인 제재 때문에 모든 것이 부족한 속에서도 비상 방역도 해야 하고 자연재해도 복구해야 하는 난관에 직면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며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방역 전선과 자연재해 복구 전선에서 우리 인민군 장병이 발휘한 애국적 헌신은 감사의 눈물 없이 대할 수 없다”며 울먹였다. 그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너무도 미안하고 영광의 밤에 장병들과 함께 있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다”고 덧붙였다. 김정은은 “고맙다”는 표현도 12번이나 사용했다.

우리 국민들을 향해서는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내며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굳건하게 손 맞잡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는 “내년 1월 8차 당 대회를 앞두고 80일 전투가 한창인 가운데 대내 결속을 최대 목적으로 한 연설로 보인다”며 “(한국 관련 연설 내용은)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보다는 매우 긍정적이나 구체적인 대남 시책은 없는 원론적인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열병식에 참석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붉은 원). /연합뉴스
ICBM 공개엔 활짝 웃음... 김여정 ‘연출설’ 유력 제기 북한 최고 지도자의 눈물을 닦는 퍼포먼스가 섞인 이날 대중 연설은 외부 세계에 상당히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외교가에서는 서구적인 열병식을 구상하고 주도한 누군가가 분명 존재할 것으로 추정했다. 가장 유력하게 꼽힌 인물은 바로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었다.

실제로 김여정은 지난 7월10일 조선중앙통신 담화를 통해 “(미국의) 독립절 기념행사를 수록한 DVD를 개인적으로 꼭 얻으려는 데 대해 위원장 동지로부터 허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LED 조명 전투기, 불꽃놀이용 폭죽, 김정은의 회색 양복,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는 연설문 등은 김여정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은 부분으로 지목됐다. 김여정은 열병식 당일 김정은 곁에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여정 ‘연출설’과 별도로 이날 열병식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형 ICBM의 등장이었다. 김정은은 단상에서 이를 내려다보며 간부들과 마주 보고 웃었고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기도 했다. 북한은 ICBM뿐 아니라 초대형 방사포와 대구경 조종 방사포,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KN-23, 신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4형’ 등 그동안 준비했던 전술·전략무기를 모두 선보였다.

열병식에서는 “우리 무력의 총사령관 동지를 육해공군 장군들이 맞이했다”며 김정은에게 ‘무력 총사령관’이라는 격상된 표현을 쓰고 군 장성들에게도 ‘장군’이라는 파격적인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김정은의 군 지위가 지난해 ‘군 최고사령관’에서 ‘공화국 무력 최고사령관’으로 높아진 데 이어 올해 ‘무력 총사령관’으로 또 올라간 것이다. 북한에서 장군 호칭은 원래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만 붙여 왔다. 군 장성급은 ‘장령’이나 ‘장성’으로 불렀다.

한남 검덕지구 태풍 피해 현장에서 복구된 주택 둘러보며 ‘애민 지도자’ 행보를 강조하는 김정은. /연합뉴스
열병식 직후에도 재난 지역 달려가 ‘애민 지도자’ 강조 김정은은 연설에서도 밝혔듯 남북 접견은 코로나19 이후로 미룬 채 곧바로 전용열차를 타고 임시 복구된 철로를 달려 ‘애민 지도자’ 행보에 몰두했다.

조선중앙통신은 14일 김정은이 태풍 ‘마이삭’으로 큰 피해를 본 연·아연 생산지 함경남도 검덕지구 복구현장을 시찰하고 군을 격려했다고 전했다. 김정은은 “실제 와보니 검덕지구의 피해가 생각보다 대단히 컸다”며 복구 현장에 투입된 군의 노력에 감사를 표시했다. 다만 “반세기도 훨씬 전에 건설한 살림집이 아직 그대로 있다”며 “대흥과 검덕, 룡양의 세기적인 낙후를 싹 털어버리고 삼지연시 다음 가는 국가적인 본보기 산간도시, 광산도시로 훌륭히 전변(시키겠다)”이라고 강조했다.

통신은 15일에도 “김정은 동지께서 함경남도 신포시와 홍원군을 비롯한 동해지구 자연재해 복구 건설장들을 돌아보시며 건설사업을 지도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은 “당 창건 경축 행사 기간 마음은 늘 어렵고 힘든 초소에 나가 있는 수도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 곁에 있었다”며 “타지에 나와 정말 고생이 많다”고 격려하면서도 “강원도, 함경북도, 함경남도 일부 단위에서 설계와 건설공법의 요구를 어기고 건설을 날림 식으로 망탕하는 고약하고 파렴치한 건설법 위반행위들이 제기되었는데 엄하게 문제를 세우도록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김정은이 당 창건 행사를 마무리하고 체제결속을 위한 흐름을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해 피해복구현장에 달려간 것으로 보인다”며 “군에 건설자재 확보에 주력하라고 한 만큼 군의 경제현장 투입이 확대될 것을 예고했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10일 공개한 신형 ICBM. 기존 ‘화성-15형’보다 미사일 길이가 길어지고 직경도 굵어졌다. /연합뉴스
美 “실망”... 서방 세계 잇딴 비판 속 중국만 두둔 김정은은 대선을 목전에 앞둔 것을 염두에 둔 듯 미국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을 일절 피했지만 열병식과 북한의 국정 방향에 대한 미국과 서방 세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 행정부 고위 관리는 10일(현지시간) “미국은 북한이 자국민의 필요보다 금지된 핵과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을 우선시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며 완전한 비핵화 달성을 위해 실질적인 협상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 인터넷 매체 복스 소속의 알렉스 워드 기자는 11일(현지시간) 트위터 계정에 “트럼프가 (북한의) 미사일 퍼레이드에 대해 ‘진짜로 화가 나 있다(really angry)’고 정통한 소식통이 내게 전했다”고 밝혔다.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4일(현지시간) CNBC ‘스쿼크박스 아시아’와 인터뷰에서 “주머니 어딘가에 양파를 숨겨뒀을 것”이라며 김정은의 눈물을 비꼬았다.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따르면 유엔 대변인실은 12일(현지시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안보리 결의에 따른 국제 의무를 완전히 준수하고 다시금 촉구한다”며 “지속 가능한 평화와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위해 외교 노력을 재개할 것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나빌라 마스랄리 EU 외교안보정책 담당 대변인도 “북한이 신형 탄도미사일을 공개한 것은 북한이 지속적으로 여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른 의무를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며 “유럽연합은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보는 오직 북한의 핵과 미사일, 여타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스위스 연방 외교부 대변인과 영국 외무부 관계자 모두 북한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향한 조치에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만 12일 정례브리핑에서 “세계에서 적지 않은 국가가 기념일에 관례로 열병식을 한다”며 북한을 유일하게 두둔했다.

서훈(왼쪽) 국가안보실장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15일(현지시간) 오후 워싱턴DC 국무부에서 면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와중에 한미동맹은 ‘흔들’... 서훈, 전격 방미 김정은이 우리 국민에겐 유화 제스처를, 미국엔 신종 무기 공개와 함께 침묵을 지킨 가운데 한미 동맹은 돌연 곳곳에서 균열의 조짐을 보였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서욱 국방부 장관과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인근 국방부 청사에서 개최한 제52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를 진행하면서 “그(공동방위 비용) 부담이 미국 납세자에게 불공평하게 떨어져선 안 된다”고 압박했다. 또 “우리는 한반도에 미군의 안정적 주둔을 보장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 합의에 이를 필요성에 모두 동의할 것이라고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상을 조속히 타결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을 감축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특히 올해 공동성명에는 예년과 달리 주한미군을 현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내용도 빠졌다.

이수혁 주미대사의 발언도 논란이 됐다. 그는 지난 11일(현지시간) 화상으로 진행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주미대사관 국정감사에서 “앞으로도 미국을 사랑할 수 있어야, 우리 국익이 돼야 미국을 선택하는 것”이라며 “사랑하지도 않는데 70년 전에 동맹을 맺었다고 해서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했다. RFA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 대변인실은 다음 날 “우리는 70년 역사의 한미동맹과 미국과 한국, 역내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동맹이 이룩한 모든 것을 극도로 자랑스러워한다”며 우회적으로 반박 입장을 냈다.

이런 상황에서 서훈 국가안보실장은 마치 소방수처럼 지난 13일 극비리에 미국을 방문, 청와대가 미국을 달래도 한미 갈등을 봉합하려 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서 실장은 15일(현지시간) 특파원들과 만나 “가장 기본적으로는 굳건한 한미동맹이 얼마나 깊이 있게 잘 관리되고 있는지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확인한 성과가 있다”며 북한 열병식과 종전선언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는 사실을 전했다.

내부 결속이 시급한 김정은, 미중 갈등, 달라진 한미동맹 가치관, 눈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 등 한반도 정세에 온갖 변수들이 다시 요동치는 모양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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