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 소리없는 목소리를 찾은 '소년'

서정민 2020. 10. 19.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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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유아인의 세계]
인생작품 세 가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어떤 연기 하고픈지 알게 된 영화"
노동석 감독 "자기인생인듯 죽을 힘"
'밀회'
"소년성 엑기스..연기 완결성 시도"
안판석 피디 "천재성에다 준비도 완벽"
'소리도 없이'
"불투명한 30대에 새로운 의지 얻어"
홍의정 감독 "저예산 영화 출연 놀라"
자기 목소리 내는 까닭
SNS 등 통해 정치·사회적 발언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 되길"
예술가집단 만들어 공동작업
"총체적으로 나를 표현하고 싶고
보석같은 친구들 세상에 알리고파"
앞으로의 연기와 삶
"인물-실제 삶 일치시켜온 연기
병 될까봐 이젠 분리시키려 해
반골 기질 벗고 편하고 재밌게"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마지막 장면. 청년필름 제공

“훌륭한 소년이 될 거예요?” 꼬마가 묻는다. 쪼그려 앉은 종대(유아인)는 꼬마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더니 대답한다. “네.” 2007년 개봉한 유아인의 영화 데뷔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로부터 13년이 흘렀다. 15일 개봉한 영화 <소리도 없이>에서 태인(유아인)은 말을 하지 않는다. 몸은 커졌어도 속은 덜 자란 소년 같은 그는 스스로 입을 닫았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꼬마와의 약속을 지켰을까? 단서를 찾고자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유아인과 마주했다.

배우 유아인. UAA 제공

■ 연기 인생의 중간 매듭이 된 세 작품

‘오늘의 유아인을 있게 한 작품 셋을 꼽으라면?’이란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장 먼저 꼽은 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연기로 따지면 유아인의 데뷔작은 2004년 성장드라마 <반올림>(KBS)이다. 듬직한 미소년으로 출연해 ‘아인 오빠’ 열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작 그는 갑작스러운 인기에 혼란스러웠다.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다”는 그는 연기를 접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갔다. 거기서 스스로를 다잡고 고민한 끝에 돌아와 찍은 독립영화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이다. “이 영화를 통해 배우로서 내 삶을 구체화하고 어떤 연기를 하고 싶은지 계획을 세우게 됐어요.”

유아인이 연기한 종대는 갑갑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진짜 총을 찾아 헤매는 소년이자 청년이다. 노동석 감독은 유아인과의 첫 만남에서 “불안해하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청춘”을 봤다. “영화 내내 불안하고 파괴적인 감정을 느껴야 했기에 많이 힘들어하면서도 마치 자기 인생을 건 것처럼 죽을힘을 다해 연기하는 게 보였어요.” 유아인은 이 영화로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신인상을 받았다.

드라마 <밀회>. JTBC 제공

다음으로 꼽은 작품은 2014년 방송한 드라마 <밀회>(JTBC). 스무살 연상의 혜원(김희애)과 사랑에 빠지는 스무살 천재 피아니스트 선재를 연기했다. 앞서 그는 2010년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 걸오 문재신 역을 맡아 미소년 이미지를 벗고 당당한 청년으로 변신했다. 이제 성인 연기자로 자리잡나 싶던 순간, 그는 2011년 영화 <완득이>를 통해 미성숙한 소년으로 돌아가며 사람들의 기대를 뒤엎었다. 유아인은 <밀회>의 선재를 두고 “소년성의 엑기스”라며 “내가 주욱 이어오며 만들고 싶었던 연기의 유형을 완결성 있게 풀어낼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유아인은 전문가도 인정할 만큼 피아노 연주 동작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 드라마를 연출한 안판석 피디는 “음악가든 뭐든 타고난 천재성이 있어야 하는데, 유아인은 타고난 천재성이 있더라”며 “현장에 이미 완벽하게 준비를 해 와서 촬영 때 허겁지겁하는 걸 한 번도 못 봤다”고 했다. <밀회>의 성공을 딛고 유아인은 이듬해 13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베테랑>, 송강호와 손발을 맞춘 <사도>로 충무로 대세 배우로 우뚝 섰다. 그렇게 그는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냈다.

영화 <소리도 없이>.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그는 마지막으로 <소리도 없이>(상영 중)를 꼽았다. “이번에 개봉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래요. 30대 들어 또다시 앞날이 불투명하고 의지가 사라져가던 저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고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 같아요.” <소리도 없이>의 태인은 입을 굳게 닫은 채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한다.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게 범죄조직의 고문·살인 현장 뒤처리를 하는 것이다. 나중엔 얼결에 유괴된 아이까지 떠맡게 된다. 분명 흉악한 범죄인데 그게 죄인지도 잘 모른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모호함, 그래서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지점이 좋았어요.”

그는 말 대신 표정·몸짓·신음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여기에 또 하나의 표현 수단을 더하기 위해 살을 15㎏이나 찌웠다. 불룩 나온 배를 통해 태인의 삶과 태도를 드러내려 한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홍의정 감독은 “유아인에게 시나리오를 보내긴 했어도 수락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말 없는 캐릭터라면 연기자로서 팔다리가 잘리는 느낌이었을 텐데, 오히려 매력으로 느낀다고 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유아인은 신인 감독의 저예산 영화를 선뜻 고른 데 대해 “대사가 없다는 사실이 도전의식을 자극하기도 했지만,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마음에 들었다”고 답했다.

영화 <베테랑>.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 ‘소리도 없이’ 사회적 소신은 계속된다

유아인과 홍 감독이 처음 만났을 때 둘은 태인이 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홍 감독이 “아무리 속내를 얘기해도 세상이 들어주지 않으면 말을 안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면, 유아인은 “말을 하면 얼마나 많은 오해가 벌어지는지, 내 생각을 말로 온전히 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유아인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내리는 판단과 무책임하게 뱉어내는 말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여서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싸이월드 미니홈피 시절부터 자신의 글을 꾸준히 써왔고,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확고한 목소리를 내왔다. 2012년 대선과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당시 정치적 소신을 거침없이 밝히는 등 정치·사회적 이슈에 더 적극적이었다. 이를 두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유아인은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판단하고 단두대에 올리는 게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내가 남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엔 비교적 목소리를 줄였지만, 그의 신념은 여전히 확고하다. “모두가 평등하게 저마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고, 이렇게 만들어낸 담론·질서·윤리가 보편적 가치가 될 거라 믿어요. 표현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시대가 됐으면 좋겠어요.” 이런 태도에 대해 정시우 영화 칼럼니스트는 “툭 내뱉은 말 한마디에도 여러 의미를 부여해 공격하는 우리나라 인터넷 환경에서 배우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생각하는 바를 드러낸다는 건 용감한 일이다. 창작자라면 독야청청 자신의 목소리도 낼 수 있어야 한다”고 평가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한국방송 갈무리

■ 예술, 또 다른 자유를 향한 갈망

유아인은 배우 말고도 직업이 하나 더 있다. 그는 2014년 친한 또래들과 예술가 집단 ‘스튜디오 콘크리트’를 결성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작가들의 전시, 다양한 협업(컬래버레이션 작업), 브랜드 잡지 발간 등을 이어오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정적으로 보여드리는 걸 넘어, 내가 그려낼 수 있는 나를 총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자유를 향한 갈망이랄까요.” 그는 “보석 같은 친구들을 세상에 더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도 했다. 자신의 영향력을 올바르게 쓸 줄 아는 것이다.

스튜디오 콘크리트는 지난해 11월부터 ‘콘크리트 1111’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예술은 돈이 많은 사람만 향유할 수 있다는 선입견이 어쩌면 예술과 사람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던 유아인은 물물교환 형태의 예술 소비 방식을 제안했다. 작가든 일반인이든 각자 만들거나 소유한 작품 또는 아이디어를 맞바꾸는 식으로 예술을 ‘값’으로 매겨 소비하는 방식에서 벗어남으로써 예술의 문턱을 낮춰보자는 발상이다. 현재 물물교환 대상을 접수 중인데, 조만간 교환을 성사시키고 그 성과와 보완할 점을 점검하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영화 <사도>. 쇼박스 제공

■ 여전히 성장 중인 소년, 유아인

유아인은 영화나 드라마 속 인물과 실제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연기해왔다. “대본을 받고 한 걸음씩 인물에 다가가다 보면, 나의 실제 상황이 그 인물의 정서와 비슷해져요. <사도>의 사도세자를 연기할 때가 내 삶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가 됐던 거죠.” 하지만 이제 그는 연기와 실제를 조금씩 떼어내려고 애쓴다. “언제까지 나를 병적으로 끌고 갈 수 있을까 싶어요. 이런 식으로는 지속하기 힘들 것 같아서 요즘은 분리하려고 해요.”

삶의 태도도 유연해진 듯하다. “전에는 청개구리처럼 일부러 사람들 기대를 비껴가는 악동·반골 기질의 소년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열린 상태에서 매 순간 끌리는 대로 따라가고 있어요. 내 것이 아닌 것은 던져버리고, 내 안의 것들을 섬세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끄집어내 사람들과 더 편하고 재밌게 놀고 싶어요.”

이런 변화가 연기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정시우 칼럼니스트는 “유아인은 꽃미남 배우, 선 굵은 배우, 요즘 트렌드인 무해한 남자 부류, 그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다. 앞날을 예상하기 힘들기에 앞날이 더 궁금한 배우다. 그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해도 실망할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기대를 더 배반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영화 <완득이>.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꼬마와의 약속대로 그는 ‘훌륭한 소년’이 됐을까? 그에게 직접 묻지는 않았다. 그가 걸어온 길, 살아온 삶에 이미 대답이 있기 때문이다. 30대 중반이 됐어도 유아인은 여전히 성장 중인 ‘소년’의 삶을 살고 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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