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9의 무차별 '융단폭격'.. 한반도는 저주받은 땅인가

박도 입력 2020. 10. 21. 14:54 수정 2020. 10. 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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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3부 소년의 꿈 (5)

[박도 기자]

 미 공군 B-29 전폭기들이 북한군 진지에 무차별 '융단폭격'하고 있다(1950. 8.).'
ⓒ NARA
 
'융단 폭격'

6.25전쟁 초기 남녘 대구 쪽에서 날아오는 비행기는 주로 미군 B-29 전폭기로 폭탄을 잔뜩 싣고 와서는 하구미 쪽이나 장터, 그리고 구미초등학교 일대에다가 마구 쏟고 갔다. 그때 폭탄 터지는 소리는 엄청 컸다. 그럴 때면 우리 조무래기들은 겁에 질린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머리는 토굴 벽에 박았다.

미 공군 B-29 전폭기는 네댓 대가 한 편대로 10여 편대가 한꺼번에 하늘에 까맣게 날아와서는 폭탄을 마치 화단에 물 주듯이 무차별로 이 땅에 마구 쏟았다. 이 산하가 그들에게는 저주의 땅이고 생명체들은 지구밖으로 몰아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폭격이 낙동강 다부동지역 일대의 '융단폭격'이란 것도 알았다. 미군 비행기들은 때때로 하늘이 하얗도록 전단지도 뿌렸다. 어른들은 그게 인민군의 항복을 권유하는 삐라라고 했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그 삐라를 주워 주로 딱지를 만들거나 밑씻개로 썼다. 보름 정도 우리를 따라다니던 앞집 경찰관 부인은 피란생활이 길어지자 자기 친정마을인 성주로 떠났다.

할아버지는 가족 보호 못지않게 소에게도 온 신경을 썼다. 우리 집 소가 군인들에게 발각되면 빼앗긴다고 달구지는 아예 금오산 기슭인 대진계곡에 푸나무를 덮어 깊이 감춰뒀다. 이른 새벽이면 할아버지는 소의 워낭도 뗀 채 더 깊은 수점골로 몰고 갔다.
  
 낙동강 유역의 피난민 행렬. 온갖 가재도구들이 다 보인다. 하지만 쌕쌕이(전투기) 공습이 오면 가재도구도 다 팽개치고 도망가기에 바빴다(1950. 8. 24.).
ⓒ NARA
 
대망동으로 피란가다

어느 날 선기동 앞산으로 소에게 꼴을 먹이러 간 할아버지는 산에서 미군 전폭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우리 동네가 불타는 것을 봤다. 그 길로 할아버지는 고모부와 허겁지겁 양동이를 들고 달려가서 우리 집에 붙은 불을 끄고 돌아왔다.

그래서 피란에서 돌아온 뒤 우리 집 본채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타지 않고 다만 아래채 방앗간만 조금 그을렸을 뿐이었다. 날마다 미군 비행기들의 폭격이 심해지고 전쟁은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게다가 장마철로 접어들자 우리 가족은 더 이상 개울가에서 피란할 수 없이 할머니 친정인 고아면 대망동으로 피란을 갔다.

그 마을은 산중이라 전란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가뭄도 몹시 심했다. 한 여름 뙤약볕 속에다 미 공군 세이브 제트기의 기총소사 공습을 이따금 받으며 대망동으로 가는 도중에 다섯 살 난 고종아우가 그런 사정도 모른 채 목마르다고 물을 달라고 울부짖었다.

우리 가족 모두 절박한 생사의 기로에 아우의 울부짖음으로 민망한 큰 고모가 들고다니던 우산으로 한 대 쥐어박자 그만 기절했다. 그러자 일행 모두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가까운 웅덩이에서 물을 떠다가 아우에게 떠다 먹이고 온몸을 주물러 겨우 살리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대망동 깊은 산동네로 피란을 한 다음부터는 비교적 전쟁의 직접 소용돌이는 피할 수 있었다. 대가족이 한 집에 얹혀 살기가 무리였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세 가구가 세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전쟁으로 학교 교실이 잿더미가 되자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불탄 교실 터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1953. 10. 22.).
ⓒ NARA
 
국수 그릇 면발처럼 많았던 뱀

우리 가족은 진외가 둘째 집에서 피란했다. 그 집에는 나보다 일곱 살 위인 봉진 아저씨가 있었다. 그 마을에서도 할아버지는 군인들에게 소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날마다 봉진 아저씨와 나는 아침을 먹은 뒤에는 소를 몰고 점티산으로갔다. 거기서 소을 먹인 후 날이 어두운 뒤에야 돌아왔다.

아저씨와 나는 소의 배가 불러지면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에다 소고삐를 매어놓고 산골 개울에서 가재를 잡거나 풀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흐르는 물에 방아를 돌리며 따분함을 잊었다. 그 산골 개울에는 가재가 매우 흔해서 돌만 뒤집으면 한두 마리씩 나왔다. 그것을 잡아구워 먹는 것도 재미있거니와 그 맛도 별미였다.

한번은 그곳 할머니를 따라 산골 웅덩이 빨래터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뱀들이 무척 많았다. 마치 국수 그릇의 면발처럼 뱀들이 득시글거렸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태연히 빨래 방망이질을 하면서 뱀들이 당신 곁으로 오면 "야, 저리 가!"라고 말했다. 그러면 뱀들은 그 말을 알아들은 듯이 방향을 틀었다. 내 평생 그렇게 많은 뱀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6·25전쟁으로 피란에서 돌아온 뒤 나는 대망동에서 피란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재미있게 기억으로 남아 "피란을 다시 가자"고 보챘을 정도로 철부지였다.
  
 크레인으로 전투기에 장전할 폭탄을 트럭에 옮겨 싣고 있다.
ⓒ NARA
 
탄피 따먹기 놀이

그해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인 9월 하순 무렵, 피란을 갔던 사람들이 대부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구미 장터마을은 성한 집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폐허였다. 거리마다 불구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동네 곳곳에는 철모, 탄피, 탄통 등이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 부서진 인민군 T-34 탱크까지도 논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하지만 탱크가 무서워 아무도 감히 접근치 않았다.

그 무렵 사람들은 그것을 고철로 팔 줄도 모를 만큼 어리석고 순진했다. 그해 9월 하순부터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들이 북으로 쫓겨 갔다. 그러자 피란을 간 사람들은 족족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집집마다 부서진 집을 다시 짓거나 고치는가 하면, 마을 빈터에는 움집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움집에는 주로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살았다. 피란에서 돌아온 우리 조무래기들은 몇 년 동안 탄피 따먹기 놀이를 했다. 그때는 M1 소총이나 카빈소총의 탄피와 탄통, 그리고 헬멧 등이 여기저기에 엄청 많이 나돌았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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