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범" 지목돼 홀로 강제연행된 12살 자폐아

강진구 기자 2020. 10. 2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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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5년 지하철수사대 범죄신고대가 설치되는 장면(자료사진은 본 기사와 상관없음)


초등학교 6학년 발달장애아동이 지하철에서 성추행범으로 몰려 경찰을 만나고 온 후 정신적 충격으로 심각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사건이 국정감사의 쟁점이 됐다. 발달장애인이 가해자로 지목된 성범죄사건의 경우 보호자나 조력자들이 제 때 범죄신고 사실을 파악해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지만 경찰은 ‘피해자보호’를 이유로 들어 방어권 행사에 필요한 정보 제공을 꺼리고 있다. 장애인단체에서는 스스로 의사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발달장애인의 경우 신고나 연행 단계부터 권리를 침해받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1일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서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발달장애인이 성범죄 혐의를 받았을 때 충분한 방어권 행사가 어렵다”며 “출동현장에서 장애를 인지한 순간부터 발달장애인의 특성에 맞는 대응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발달장애아동(자폐2급) 태윤(가명·12)이의 사례를 소개했다.

태윤이는 대안학교로 등교하기 위해 매일 오전 9시25분 광화문 5호선 지하철 플랫폼에서 엄마와 헤어져 혼자 지하철을 타고 신길역까지 이동한다. 태윤이는 혼자 등교하기 위해 활동보조인과 1년 이상 자립훈련을 했다.

지난 6월10일 오전9시52분 태윤이 엄마는 모르는 여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여성은 태윤이가 가지고 다니는 키즈폰으로 전화를 걸어 ‘영등포 시장역이다. 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나와달라’고 했다. 여성은 자신이 누구인지, 태윤이를 왜 데리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태윤이 아빠는 112로 실종신고를 했다. 9시56분 태윤이 키즈폰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10시3분 대안학교에서 태윤이가 학교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연락이 왔다.

태윤이 부모의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사이 112 출동신고를 받은 형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태윤이가 여성을 두 번 성추행해 경찰이 영등포시장역 역무실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태윤이 부모는 오전10시30분 영등포시장역 역무실에 도착했다. 담당 최모 형사는 “같은 여성으로부터 6월3일에도 신고된 건이 있어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아이가 어리고 장애도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가 무슨 짓을 한 거냐”는 질문에 형사는 ‘피해자 보호차원에서 알려줄 수 없다’고만 했다. 태윤이 부모는 영문도 모른채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야단치고 역무실에서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까지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이가 경찰에 연행되는 과정에서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 뒤 태윤이 아빠는 사건을 담당한 최 형사로부터 ‘조사가 필요하니 6월13일 지하철 수사대에서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태윤 아빠는 ‘굳이 진술능력도 없는 아이를 경찰서에서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혼자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 형사는 ‘담당형사가 직접 보고 진술능력을 판단해야 한다’며 피의자인 태윤이에 대한 직접 조사를 고집했다. 그는 6월3일 사건은 담당형사가 따로 있다는 말도 했다. 사건의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면 ‘그건 경찰서에 와야 알려주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태윤 아빠는 “사실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으면서 아이를 잡아가고 부모를 부르는 경우가 어디있느냐”고 항의했다. 그제야 최 형사는 ‘6월10일 잡혀간 것은 6월3일 성추행 피해를 신고했던 여성이 태윤이를 지하철에서 발견하고 신고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6월3일, 10일 두건에 걸친 성추행으로 태윤이가 경찰에 끌려간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태윤 아빠는 “6월10일에는 현행범도 아니고 발달장애 2급 아이가 등교를 하다 영문도 모르는 상태에서 (여성의 신고만으로) 잡혀간 건데 그게 타당하냐”고 따졌다. 태윤 아빠는 경찰로부터 좀 더 명확한 해명을 들으려 했지만 같은 얘기가 반복됐다. 경찰은 ‘태윤이가 피해여성을 만지려고 했었다’며 ‘피해자보호를 위해 자세한 설명은 경찰서에 와야 설명을 해줄 수 있다’고 했다

결국 태윤이 부모는 경찰과 실랑이 끝에 변호사와 함께 6월18일 지하철경찰대에 출석했다. 경찰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담당 형사는 ‘성범죄는 (13세 미만) 촉법소년이어도 소년원 보호처분이 가능하다’며 겁을 줬다. 태윤이 엄마가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강하게 항의하자 형사는 “애가 만지려고 다가왔잖아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과 부모 사이 분위기가 격해지자 지하철경찰대 김모 경감이 아이의 연행과정에 설명을 해줬다. 그제야 태윤이 부모는 6월10일 연행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태윤이는 평소처럼 광화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신길역에서 내리려고 했으나 피해여성이 ‘전에 나를 성추행하려던 아이’라며 소리를 쳤다. 태윤이는 지하철에 있던 승객 5명에 붙잡혀 역무원 3인을 거쳐 경찰에 인계됐다. 현행범도 아니고 강제 추행이 이뤄진 것도 아님에도 장애아동을 역무실로 끌고간 것이다. 경찰은 발달장애아를 강제 연행한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처음에 임의동행을 주장했다. 하지만 발달장애아에 대해 임의동행이 가능한 것이냐는 지적이 나오자 경찰은 ‘현장을 우리가 지휘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역무원들에게 떠넘겼다.

그러다가 경찰은 종전 부모에게 했던 설명을 뒤집고 태윤이가 6월10일에도 강제추행을 시도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처음에는 태윤이가 피해 여성에 다가간 것으로 설명했지만 나중에는 성추행을 시도하기 위해 팔을 뻗으려다가 멈춘 것이라고 했다. 결국 태윤이는 6월3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강제추행 미수혐의가 적용돼 서울가정법원으로 사건이 넘겨졌다.

태윤 아빠는 “경찰이 현행범도 아닌 태윤이를 강제연행한 것이 부담되니 6월10일에도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사건을 부풀린 것 같다”며 “태윤이는 스스로 당시 상황을 설명할 수 없으니 그 억울함을 누가 대변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자폐인의 행동은 일반인의 행동과 다르게 봐야 한다. 팔을 뻗은 것도 아니고 팔을 뻗으려고 하다가 멈췄다는 행위가 장애아동과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갈 만큼 중한 소년범죄냐”며 “경찰은 내가 장애인단체와 기자회견하고 문제제기했다는 이유로 부모가 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가해아동이 적절한 보호처분이 필요해 보인다고 의견을 냈다. 나는 내 자식의 침해된 인권을 지키기 위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태윤이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후 예전처럼 혼자 지하철을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안전을 위해 늘 차고 다니던 키즈폰도 무섭다고 내던진 상태다. 태윤이는 소아정신과에서 정신상담도 받았다. 상담과정을 기록한 동영상을 보면 태윤이는 그날의 상황에 대해 ‘신길역에서 내려야 해요’ ‘학교에 가야 돼요’ ‘사람들이 붙잡았어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태윤이 엄마는 “자폐 2급인 아이가 스스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목의 재활치료사가 부모와 함께 피땀 흘려 노력해야 했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라며“아이는 이제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뒤로 넘어가고 수년간의 자립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언제 다시 지하철을 탈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태윤이 관련 기록을 보면 피해 여성과 승객들, 역무원, 경찰은 강제연행 당시 태윤이가 장애인인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태윤 아빠는 “성인지감수성 못지않게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이해하는 장애인감수성이 필요한데 장애인들의 인권보장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고 했다.

사건을 대리한 나동환 변호사는 “성범죄 피해자진술은 비밀로 보호되기 때문에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발달장애아동은 물론 부모 역시 무슨 행위로 성범죄자가 됐는지 몰라서 제대로 변명을 할 수가 없다”며 “경찰이 왜 처음 설명과 달리 태윤이가 6월10일에도 성추행을 시도했다고 했는지 피해자 진술조서 등 관련기록을 제공하지 않으니 알 방법이 없다”고 답답해했다.

그는 또 “비장애인의 경우는 피해자 진술이 공개되지 않더라도 가해자가 스스로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에 기초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발달장애인이 가해자인 사건 경우 피해자 진술이 뭔지 알지 못하면 주위에서 도와줄 수가 없다”고 했다.

발달장애인이 피의자가 된 경우 성범죄 성립여부는 피해자의 진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행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수사기관이 발달장애인을 조사하는 경우 신뢰관계인 조력제도(12조4항)를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발달장애인에 대한 조력제도가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입법이 필요해 보인다.

김민석 의원은 “자기방어 및 의사표현 능력이 부족한 발달장애인의 경우 신고 또는 연행단계부터 권리침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현행 의사소통인 조력제도, 전담경찰관 제도 등은 연행과정의 지침이 없다”며 “수사단계가 아닌 신고(연행)단계부터 발달장애인에 대한 지원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지하철경찰대 관계자는 "현장에 먼저 도착한 역무원이 태윤이를 역무실로 데려갔고 이후 현장에 도착한 지하철경찰대 최 형사는 발달장애가 있는 것을 알고 관련 지침에 따라 조사를 중단하고 부모에게 인계했다"고 주장했다.

강진구 기자 kangj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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