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대통령을 시해한 반역자? 유신의 심장을 쏜 혁명가? [화제의 책]

홍진수 기자 입력 2020. 10. 23. 11:13 수정 2020. 10. 2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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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0.26사건 12일 뒤인 1979년 11월 7일 공개된 현장검증.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해 권총 한 발을 쏜 김재규가 앞에 앉아 있던 박정희 대통령을 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김재규 장군 평전
김삼웅 지음
두레 | 304쪽 | 1만8000원

1980년 5월24일 아침 7시,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재규가 사형집행실로 향했다. 집행관이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집행관이 다시 스님과 목사를 모셨으니 집례를 받겠느냐고 물었다. 김재규가 입을 열었다. “나를 위해 애쓰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앞서 김재규는 변호인과 가족들에게 국군동정복을 입혀 매장하고, 묘비에는 ‘김재규 장군지묘’라 써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사형집행 당일 경기도 광주군 보포면 능곡리 삼성공원 묘지에 제한된 유족과 많은 기관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매장됐다.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1979년 10월26일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사살했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18년 만에 막을 내렸다.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김재규를 ‘대통령 시해범’ ‘반역자’라고 부른다.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서 밀린 김재규가 이를 참지 못해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반면 김재규를 ‘독재자를 처단한 의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박정희 독재체제를 끝내기 위한 애국행위였다는 것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쓴 이 책은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라는 부제와 달리 ‘혁명가’, 그러니까 ‘의인’이라는 데 훨씬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 책에 따르면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에서 많은 영화를 누렸지만 유신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유신을 계기로 박정희의 집권욕이 애국심을 넘어섰다고 판단해 등을 돌렸다. 그리고 결국 이것이 ‘10·26 거사’로 이어졌다.

김재규는 10·26에 앞서 두 번이나 박정희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972년 3군단장 시절 사령부 울타리를, 외부의 침입을 막기보다 내부 사람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형태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박정희가 3군단을 방문했을 때 연금한 뒤 하야시킬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심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이 내용은 10·26 사건 이후 김재규의 변호인단이 고등군법회의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에 나온다.

1974년 건설부 장관으로 발령받은 뒤에도 발령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를 저격하려고 마음먹었다. 국민과 어머니, 아내, 딸 및 남동생들에게 전할 유서 다섯 통을 집 서랍에 넣어두고 떠났다. 그러나 이 역시 실행하지 못했고, 유서는 태워버렸다. 김재규가 다시 마음을 먹고, 실행에 이르기까지는 5년이 더 필요했다.

1989년 2월 전남·광주의 민주인사들이 모인 송죽회 회원들은 김재규를 추모해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2000년 5월에는 ‘김재규 장군 20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함세웅 신부를 대표로 한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가 꾸려졌다.

사형 집행 하루 전인 1980년 5월23일 김재규는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또 한차례의 재판이 있다. 제4심이다. 제4심은 바로 하늘이 심판하는 것이다.” 인간의 재판 역시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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