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달리는 냉장고'.. 우리는 골목길 엔터테이너

박돈규 기자 2020. 10. 2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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禁男 50년 야쿠르트 아줌마
전덕순 매니저가 20일 냉장카트 '코코'를 몰고 서울 봉천동 주택가 골목길을 지나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나’는 흔하다. 나를 빼놓고는 아파트촌 풍경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다. 주택가 골목길부터 울릉도까지 전국에 동료만 1만1000여 명이다. 내가 탑승한 전동 카트는 최고 시속 8㎞로 고객을 향해 달린다. 느리다고 얕보지 마라. 점점 치열해지는 배송 전쟁이 낳은 신무기라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다.

우리는 금남(禁男) 조직이다. 1971년 처음 등장할 때부터 가정주부 일자리 창출을 내걸고 방문 판매원을 모집했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제 미혼 여성도 이 일을 한다. 지난해부터 공식 명칭이 ‘프레시 매니저(fresh manager)’로 바뀌었지만 입에 착 달라붙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를 ‘야쿠르트 아줌마’라 부른다.

어느덧 50년이다. 25원이던 65㎖ 야쿠르트 값은 200원으로 올랐다. 유니폼은 살구색에서 베이지색이 됐다. 가방은 손수레로, 또 전동 카트로 바뀌었다. 바퀴 달린 냉장고에는 야쿠르트만 있는 게 아니다. 온라인으로 주문만 하시라. 한우부터 김치, 간편식과 마스크 팩까지 200여 종을 배달한다. 야쿠르트 아줌마는 ‘움직이는 편의점’이다.

1970년대 야쿠르트 광고 /한국야쿠르트

◇베테랑의 영업 노하우

지난 20일 오후 서울 봉천동 봉일시장. 약국 옆 길목에 ‘코코(cold&cool)’가 보였다. 2014년부터 보급된 전동 카트를 그렇게 부른다. 2004년부터 이 일에 몸담았다는 전덕순(49) 매니저는 17년 차 베테랑. ‘이 구역의 야쿠르트 아줌마는 나야 나’라는 포스를 뿜어냈다. 이를테면 고객을 이렇게 불렀다.

“언니!”

들뜨고 반가운 톤이었다. 60대 여성에게 빨대 꽂은 야쿠르트를 건넸고 다 마시면 재빨리 수거했다. “남편이 요즘 입맛이 없대” 하는 손님에게는 그래놀라(곡물 시리얼)와 플레인 요거트를 해법처럼 내밀었다. 전 매니저는 “의심할 바 없는 할머니가 아닌 이상 여성 고객은 모두 언니”라며 “마스크 착용이 필수인 올해는 눈웃음으로 표정을 보강하느라 주름이 늘었다”고 했다.

이 지역은 상가와 주택가가 핵심이다. 이날은 프레시 매니저를 준비하는 젊은 여성(30)이 현장 실습을 받고 있었다. 전덕순 매니저는 영업 비결로 세 가지를 강조했다. 상냥하게 인사하기, 귀담아 듣기, 윗선 뚫기. 윗선 뚫기란 회사에서 임원급을 고객으로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건물 출입이 수월해지고 평직원들도 눈치 안 보고 야쿠르트를 주문하니까.

“오전 7시 30분에 음료 100만원어치를 전동 카트 가득 채우고 나왔어요. 퇴근할 때까지 비우는 게 목표죠. 독거노인이 많은데 야쿠르트 배달하며 안부를 여쭤요. 가끔 등에 파스도 붙여드리고요(웃음). 제 구역에 요양 병원이 하나 있는데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들어가질 못해요. 그 물량을 거리에서 판매해 그럭저럭 수입을 유지합니다.”

◇경찰 저지선도 뚫는다

코로나 사태 이후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대기업이나 병원 출입에 지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동네 구석구석부터 산 꼭대기, 회사 사무실은 여전히 자유롭게 드나든다. 한곳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그 동네와 주민에 대해 경찰 못지않게 빠삭하다. 그래서 ‘공인된 정보 수집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국야쿠르트 홍보팀은 “프레시 매니저의 평균 근속 기간은 12.5년이고 10년 이상 활동한 사람이 과반”이라고 했다.

야쿠르트 아줌마는 제품을 위탁받아 판매하고 수수료를 챙기는 개인 사업자다. 월평균 수입은 212만원. 상위 50%는 약 270만원을 가져간다. 보험에 판매왕이 있듯이 야쿠르트에도 영업 달인이 있다. 2012년 경남 양산점의 한 매니저는 연간 매출 3억3710만원을 올렸다. 당시 180원이던 야쿠르트를 187만여 개나 판 셈이다.

야쿠르트가 고급 음료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서울 명동 사채업자들이 손님을 대접할 때도 야쿠르트를 애용했다. 서울지하철노조가 파업하며 명동성당 점거 농성을 벌인 1994년 6월에는 경찰과 노조원을 뚫고 들어간 야쿠르트 아줌마가 있었다. 명동에서 30년 넘게 일한 정영희 매니저. 당시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길을 비켰다고 한다.

“추기경님 야쿠르트 배달 가야 해요!”

야쿠르트 아줌마가 무엇을 파는지 궁금한가? 냉장카트 내부를 공개한다. 1등 효자 상품은 '윌'이라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골목길의 엔터테이너

노모(老母)에게 드린 용돈은 결국 누구에게 갈까. 야쿠르트 아줌마일 수도 있다. 할머니들 자식 자랑이나 속상한 일을 잘 들어주기 때문이다. 여러 번 한 얘기도 타박하거나 내색하지 않고 경청한다. 누구 생신이면 노래를 불러드리는 야쿠르트 아줌마도 있다.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그 마음에 할머니들이 지갑을 연다. 돌아가며 전동 카트 안에 있는 음료를 하나씩 돌릴 수밖에.

iMBC 대표를 지낸 강연가 손관승씨는 “목동 어느 아파트 단지에 계시는 내 어머니에게 벌어진 일”이라며 “야쿠르트 아주머니의 역할은 단지 음료 몇 개를 파는 데 그치지 않는다. 소외된 노인의 말벗이 돼주고,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만나면 표정이 밝아지고 활기가 돌아 ‘행복 바이러스’라고도 한다. 손씨는 “재미있게 노래까지 불러주는 골목길 엔터테이너”라고 했다.

2017년 서울 은평구 한 임대 아파트에서 혼자 살다 숨진 노인을 발견하고 신고한 사람은 야쿠르트 아줌마였다. 배달한 야쿠르트가 문 앞에 쌓여갔기 때문이다. 용산경찰서는 최근 한국야쿠르트와 ‘공동체 치안 활성화를 위한 업무 협약’을 맺었다. 프레시 매니저 52명이 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우범 지역에 수상한 사람은 없는지, 독거노인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진 않았는지 살피는 ‘동네 순찰’을 돕고 있다. 무보수 자원봉사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야쿠르트 배달하며 ‘안녕하신가요?’ 하고 문을 두드리는 일이 고독사를 예방할 수 있다.

하이프레시 앱을 내려받으면 가까운 곳에 있는 야쿠르트 아줌마(프레시 매니저)를 실시간으로 찾을 수 있다 /인터넷 캡처

◇심리적 갈망에 응답하다

야쿠르트 65㎖는 영양학적으로 열량이 35㎉다. 성분은 이렇게 적혀 있다. 탈지분유(네덜란드산), 올리고당, 설탕, 자일리톨, 합성 향료, 유산균, 정제수···.

하지만 어떤 야쿠르트 아줌마는 그 이상의 것을 판다. 공감, 경청, 위로 등 소비자의 갈망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심리적 영양분이다. ‘구독 경제’의 원조로 꼽히는 그들 한 명 한 명이 지역에 밀착된 고객센터 역할도 해 피드백이 빠르다.

WSJ가 주목했듯이 코코는 ‘세계 최초의 달리는 냉장 카트’다.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대리점에서 밤새 충전한 코코를 몰고 아침마다 구역으로 흩어진다. 영역 침범은 금물. 일을 그만둘 경우 고객까지 인계한다. 한국야쿠르트는 “매출의 90%가 프레시 매니저들을 통해 일어난다. 갈 수 있는 곳이라면 강원도 산골에도 배달한다”며 “CJ ‘비비고’, 농심 ‘켈로그’ 등 타사 상품까지 받아 판매하고 있다”고 했다. 주문한 물건을 택배 기사가 아닌 야쿠르트 아줌마가 집까지 가져다 준다는 게 강점이다.

밥벌이는 누구에게나 고단하다. 야쿠르트 아줌마들에게는 거리가 일터다. 전덕순 매니저는 “고객과 통화하는 걸 남편이 옆에서 보더니 ‘내 전화도 그렇게 상냥하게 좀 받아주지’라고 불평했다”며 웃었다.

하이프레시 앱을 내려받으면 야쿠르트 아줌마가 지금 어디 있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21일 오후에 그 지도를 열어보니 반지름 500m인 원 안에 5명이 보였다. 오늘도 냉장 카트를 타고 최고 시속 8㎞로 우리 동네 골목길을 달린다.

야쿠르트 판매 베테랑 전덕순 매니저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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