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는 '정조 변호인' 아니다.. 우상화 경계해야"

권경성 2020. 10. 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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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2012년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에 대한 통설을 뒤집은 책 ‘권력과 인간’을 출간, 역사학계를 흔든 정병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나경 인턴기자

“연구자들이 연구 대상인 임금의 변호인이 돼 정조를 옹호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조 문제라면 정병설(54)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도 할 말이 있다. 2012년 펴낸 ‘권력과 인간’을 통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쟁으로 인한 것이라던 당시 역사학계 통설을 뒤집었다. “반역을 꾀하다 사도세자가 죽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 교수의 주장 가운데 기존 학계가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 부분은, 사도세자가 반역죄로 죽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아들 정조가 역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대목이었다. ‘정조=훌륭한 개혁 군주’라는 공식을 무너뜨릴 수 없으니 ‘정조는 훌륭한 통치자였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는, 반론치고는 희한한 반론이, 심지어는 ‘설령 정조가 사도세자 기록을 조작했다 해도 그건 왜곡이라기보다 통치 행위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조금은 기괴한 반론이 나왔다.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정 교수는 이런 풍토를 답답하게 여겼다. 그는 “훌륭한 정치와 역사 왜곡은 별개의 문제”라며 “정조가 훌륭한 군주라 해도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고, 그것도 아버지를 위한 거짓말이라면 당대 도덕률에서 충분히 용서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조가 비밀리에 신하에게 보낸 간찰, ‘심환지 어첩’이 2009년 대거 발견되면서 신하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정조의 ‘어찰 정치’가 새로 조명됐다는 사실을 환기하기도 했다. 정조는 정치 공작에 능한 ‘마키아벨리적 군주’였다는 얘기다. 정 교수는 실제 정조가 성군이라기보다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걸 직접 목격한, 자기 보전에 급급했던 신경증적 전제군주였을 거라고 간주한다.

정 교수는 정조에 대한 다른 해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우선 역사에서 옳고 그름의 평가를 자꾸 찾으려는 학계 일각의 태도다. 역사학의 목표는 사실과 진실의 규명인데, 도덕적 판단부터 먼저 내리려 든다. “나는 정조가 역사를 왜곡했는지 안 했는지 사실 여부를 따졌는데, 나를 비판하는 일부 학자들은 그의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 평가하며 정조의 훌륭한 통치를 볼 때 왜곡 가능성이 없다는 식의 주장을 폈어요. 안타까운 건, 역사적 인물을 두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평가부터 하려는 연구자가 여전히 적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 건 사실을 충분히 따지고 밝힌 뒤에 해도 늦지 않은데 말이죠.”

역사에 대한 섣부른 도덕적 판단은 인물에 대한 우상화로 이어진다. 정 교수가 보기에, 역사적 인물의 우상화는 ‘역사의 대중화’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지는 대중 영합이 원인이다. 이른바 ‘역사상업주의’다. 정조도 그런 인물이다. 정조뿐 아니다. 정 교수는 다산 정약용도 지나치게 우상화된 대표적 인물로 꼽았다. “훌륭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문제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목민심서’를 썼다는 게 그런 책을 썼다는 거지 목민을 잘했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다산의 인간적 흠결을 거론하면 사람들은 싫어하고, 학자들은 입을 다물어요. 그렇게 성인(聖人) 다산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렇기에 학자는 연구 대상을 호평하는 일을 더더욱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정 교수는 “일부 조선 시대 연구자들을 보면, 영조든 정조든 임금의 말이라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연구자 스스로가 ‘조선의 신하’를 자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역사 기록 자체가 교묘하기에 거듭 신중해야 한다. “한쪽 방향 자료만 모아 놓으면 어떤 사람도 훌륭한 인물로 만들 수 있는 게 역사 기록입니다. 요즘 말로 ‘악마의 편집’이죠.”

사도세자가 좋은 예다. 부인인 혜경궁 홍씨, 아들인 정조가 각각 그린 사도세자의 모습은 정반대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완벽한 진실이고 다른 쪽이 거짓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자료만 나열했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라도 학자라면 철저한 의심 위에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합리적 논리에 따라 해석을 쌓아 가야 한다”고 말했다.

19일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정병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왕나경 인턴기자

그래서 필요한 건 학계 내 더 많은 소통이다. 논쟁이 일어나지 않으니 자정(自淨)이 일어나지 않고 우상만 남는다. 정 교수가 ‘권력과 인간’ 출간 이후 자신에게 쏟아진, 정조가 그럴 리 없다는 내용의 비판에 대해 반박하는 논문을 다음달 16일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를 통해 발표하는 것도 건전한 논쟁이 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정병설 교수는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한 국문학자다. ‘한중록’ 등 다양한 사료들을 분석한 뒤 2012년 펴낸 ‘권력과 인간’을 통해 사도세자가 영조를 죽이려다 죽임을 당했다는 가설을 내놨다. 한글 소설을 중심으로 주로 조선 시대 주변부 문화를 탐구해 왔다.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소수록 읽기’,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및 ‘조선의 음담패설-기이재상담 읽기’ 등이 저서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ㆍ석사ㆍ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교수로 재직 중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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