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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② 평양성-국보유적 제1호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입력 2020. 10. 24. 08:02 수정 2020. 10. 2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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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우외환(內憂外患) 극복책으로 수도 이전
도성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평양의 상징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평양에 갔을 때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는 평양성(장안성) 성벽을 둘러보는 것이다. 과거 거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의 흔적을 하나씩 확인하고, 평양 시민들의 여가생활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평양성의 남아 있는 성벽은 처음 쌓은 지 1600여 년이 흘렀지만 의연히 고구려 수도성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현재 평양성은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로 지정돼 있다.

금수산 정상에 있는 최승대에서 내려다 본 청류벽(淸流壁). 평양성의 외성이 있던 금수산 동쪽은 대동강과 접해 있고, 예로부터 ‘청류벽’이라고 부르는 절벽으로 이뤄져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위쪽으로 북한이 새로 세운 감찬정이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뉴스1
평양성 북성의 을밀대에서 청류정으로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 국보유적 제1호 표식비. 북한은 1990년대 후반 국보유적 제1호를 대동문에서 평양성으로 바꿨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 뉴스1

국내성에서 평양 대성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59년 만에 금수산 서쪽으로 다시 천도했다.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평원왕) 28년(586)에 도읍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라고 딱 한 줄만 기록돼 있다.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은 고구려 초기에 편찬된 유기(留記)를 개수해 신집(新集)이라는 고구려 역사서를 냈다. 아쉽게도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렇듯 기록으로는 파악되지 않지만 당시 고구려가 처한 국내외 상황을 통해 천도의 이유를 짐작할 수는 있다. 고구려의 24대 국왕 양원왕(陽原王, 재위 545∼559년)은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즉위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다. 부왕인 안원왕(安原王)이 죽은 뒤 두 왕비가 각각 자기 소생의 왕자를 왕으로 세우려 하여 두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들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고, 양원왕은 여기서 승리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지배귀족 사이의 분쟁으로 왕권은 약화됐다.

더구나 이전 수도였던 환도성(丸都城)의 귀족들이 모반을 꾀하기도 했다. 왕권의 동요와 더불어 주변 국제정세도 불안했다. 신흥 유목 기마민족인 돌궐(突厥)이 고구려의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해 왔고, 돌궐과의 대치상태 속에서 551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이러한 국내외의 외기를 극복하기 위해 양원왕과 고구려 귀족세력은 새로운 도성을 축조하고 수도를 이전할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공사는 아들인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년) 때 시작됐다. 평원왕이 즉위한 지 28년째 되는 586년, 고구려는 마침내 평양성의 내성(內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새로운 도성의 이름은 장안성(長安城)이었다. 장안성에 조성된 왕궁은 기존의 안학궁에서 직선거리로 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평양성이라고도 부르고, 기존 시가지와 구분하기 위해 장안성이라고도 불렀다.

모란봉 을밀대에서 내려다 본 만수대언덕의 김일성 동상과 조선혁명박물관. 고구려 때 평양성에 도읍하면서 왕이 기거하던 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뉴스1

산책에 동행한 북한의 해설강사는 평양성의 개괄적인 연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고구려는 안학궁성시기 수도 보위의 제한성과 강력한 국력에 기초하여 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을 목적 밑에 552년부터 586년 사이에 새 수도로 평양성을 건설했습니다. 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이 솟고, 동·서·남 세면에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아 자연 해자(垓字, 성벽 바깥에 파놓은 물도랑)를 이룬 유리한 지대에 자리 잡았습니다."

문헌에는 평양성의 축성시기와 관련해 552년에 성을 쌓기 시작해 586년에 완공됐다는 간단한 기록만이 남아있었으나 여러 개의 각자성석(刻字城石: 글자를 새긴 성돌, 국보유적 제140호)이 발견되면서 성 건설의 단계와 규모 등이 알려지게 됐다. 현재까지 5개가 발견된 각자성석에는 성벽 축조 시기, 성벽 축조 책임자와 축조 거리 등이 새겨져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천도는 했지만 장안성은 완공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평원왕은 왕궁 방어에 중요한 북성(外城) 건설을 서두르고, 백성들이 거주할 외성도 쌓기 시작했다.

이 공사는 아들인 영양왕(嬰陽王,재위 590~618) 때 완공된다. 이렇게 장안성 축성은 3대에 걸쳐, 30년이 넘는 대역사(大役事) 끝에 완성됐다. 장안성은 복합식 구조의 평산성이라는 점에서 고구려 도성 성곽 발전의 가장 완성된 형태로 평가된다. 평양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교차하고 남북으로 평지와 구릉이 알맞게 배치된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도읍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요, 그 위 봉우리는 모란봉인데, 모두 작은 산으로서 송도와 한성의 주산(主山)처럼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다"라고 했다.

평양성의 바깥성벽은 금수산의 모란봉을 북쪽 끝으로 하고, 서남으로 을밀대, 만수대를 타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보통강과 대동강이 합치는 목에서 동북으로 꺾이어 대동강을 거슬러 대동문을 지나 다시 모란봉에 이른다. 평양성의 둘레는 약 16km, 성벽의 총 연장길이는 23km, 총 면적은 11.85k㎡에 달했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둘레가 18.6km이니 얼추 비슷한 규모인 셈이다. 고려시대에 출간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기 주변지역을 포함한 수도의 집 수는 21만 508호에 이르렀다.

20세기 초에 그린 평양성도. 6세기 고구려의 수도성으로 건설된 이후로 1,300여 년 동안 번성한 평양성의 전경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10.24.© 뉴스1
북한이 조사결과 밝혀진 평양성의 평면도. (미디어한국학 제공)© 뉴스1

평양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서경(고려), 평안남도 감영(조선시대)으로 소재지로 중요시돼, 계속 개축되고 보수돼 대한제국 시기까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됐다. 평양성의 중성, 외성 구역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시가지로 사용됐기 때문에 성벽이 많이 훼손됐지만, 그래도 20세기 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성도를 보면 평양성의 북성과 내성, 중성의 외곽 성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대동강변 대동문(오른쪽), 연광정과 평양성 내성구역의 건물과 기와집들. 지금은 대동문과 연광정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다. 그나마 대동문의 서쪽에 있던 평양성 내성의 서문 정해문의 문루는 1927년에 모란봉으로 옮겨져 ‘청류정’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뉴스1
일제강점기에 평양의 중심부에 조성된 일본인 거리 야마토마치(大和町)의 모습.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고, 전차선이 부설되면서 전통가옥과 평양성의 성곽들이 많이 허물어졌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뉴스1

그러나 일제강점이 되면서 대동강에 대동교가 세워지고, 평양의 내성과 외성을 잇는 중심도로에 일본인 중심의 야마토마치(大和町) 거리를 비롯해 일제 통치기구 건물들이 속속 건설되면서 심각하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또한 1920년대에 평양에 전차선이 부설되면서 평양성의 성벽들이 허물어졌고, 고구려 때 지워진 영명사 안에는 차집(요정)이 들어섰다.

고구려 때 처음 세워진 사찰 영명사 대웅전 옆 건물에 들어선 일제강점기의 차집(料亭).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평양 기생들의 화보사진은 상당수 이곳에서 촬영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 뉴스1
일제강점기에 대동강변 고구려 성벽 위에 들어선 조선요리집 동일관의 모습. 현재 옥류관이 있는 자리로, 지금은 성벽 자체가 대부분 유실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 뉴스1

특히 평양성의 성곽과 역사유적들은 6.25전쟁 시기에 심각하게 파괴됐다. 유일하게 보통문만이 엄청난 폭격에도 파괴되지 않아 본래의 모습을 유지했고, 내성과 북성의 문과 장대는 전쟁이 끝난 후 복구됐다.

1955년 경 모란봉 최승대에서 촬영한 대동교, 모란봉과 평양 중심부의 모습. 6·25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과 산림이 파괴되고, 청류정, 대동문 등의 문루들도 피해를 입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 뉴스1

평양성은 북성(北城),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 등 총 4개의 부분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궁이 있던 내성은 을밀대에서 시작해 현재의 만수대와 남산재를 거쳐 대동문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감싸고 있었다. 안산과 창광산, 해방산지역을 포괄하는 중성 안에는 주로 고구려의 중앙 관청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중성의 남쪽 벽을 경계로 하여 지금의 평양 중구역 남부와 평천구역 일대에 걸쳐 쌓은 외성 안에는 일반 평민들이 주로 거주했다. 외곽 방어성인 북성은 을밀대에서 북쪽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평양성 북성의 동암문 바깥 성벽 전경. 현재까지 고구려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지역이다. 암문은 평상시에는 막아두었다가 왜적이 침입할 때마다 적정을 탐지하거나 적을 기습하는 등 유사시에만 사용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 뉴스1
평양성 내성의 북문인 칠성문과 바깥에 세워진 옹벽의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뉴스1

현재 평양성의 윤곽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은 동평양에 세워져 있는 주체사상탑이다. 이 탑의 150m 높이 전망대에 오르면 동쪽으로 장수왕 때 도읍지였던 대성산과 안학궁터부터 임시수도였던 청암동성터, 장안성의 외성, 내성, 북성, 외성지역이 한 눈에 조망된다. 대체로 현재 평양역과 고려호텔에서 남쪽지역이 외성구역이고, 김일성광장과 조선노동당 본부청사가 있는 지역이 중성, 김일성주석의 동상이 있는 만수대, 대동문, 옥류관 등이 내성구역 안에 있고, 을밀대가 있는 모란봉 주변이 북성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의 평양 감영은 현재 만수대예술극장 자리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체사상탑 전망대에서 본 평양 중심부의 모습. 사진 가장 오른쪽 멀리 보이는 곳이 평양 천도 후 고구려의 첫 수도성(대성산성과 안학궁)이 있던 대성산이고, 중앙의 방송탑 앞쪽으로 보이는 산이 모란봉으로 천도 후 평양성의 외성(외성)이 있던 지역이다. 사진상 대동강가에 있는 유람선에서 멀리 높게 보이는 류경호텔 앞쪽 보통강을 동쪽으로 모란봉 중턱 모란봉극장까지를 에워싼 성벽이 내성(內城)구역, 김일성광장부터 북서쪽에 있는 해방산과 창광산을 포괄하는 지역이 중성(中城)구역에 해당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뉴스1
만수대언덕에서 바라다 본 모란봉 전경. 고구려 때 평양성의 북성이 있던 곳으로, 도로가 나서면 성벽이 끊어졌지만 도로 오른쪽으로 평양성곽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중앙에 보이는 건물이 모란봉극장으로 1948년 4월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등 남측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연석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24.© 뉴스1

왕의 거처가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만수대언덕이나 북한이 1982년에 세운 개선문의 전망대에 오르면 방어성으로 견고하게 지어진 북성구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도 도로 주변에는 고구려시기에 쌓은 성벽 흔적이 많이 남아 있고, 그 위쪽으로 모란봉극장 등 여러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평양성의 흔적들은 현재의 평양이 6·25전쟁이 끝난 후 폐허상태에서 신시가지가 건설됐지만 고구려 때 계획도시로 건설된 평양성의 기반 위에서 복구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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