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신해철의 최고 명반 '정글스토리'

홍장원 2020. 10. 24. 15: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해철/사진=매경DB
[스쿨오브락 - 165] 1990년대 감성 충만한 사춘기 시절을 보낸 중·고등 남자 아이가 신해철의 팬이 아니긴 힘들었다. 그가 보장된 아이돌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한국에서 밴드 음악을 한다고 선언했을 때 록이 뭔지도 모르고 신해철이 한다면 나도 좋아하겠다며 록을 듣기 시작한 아이들도 있었다.

이제 우리 곁에 없는 신해철은 길지 않은 생애 참으로 많은 것을 세상에 남긴 사람이었다. 대학가요제에서 심사위원을 홀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신시사이저 도입부를 무기로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재기발랄한 청년이자, 아련한 발라드로 동년배 여심을 홀린 미모의 아이돌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록밴드 넥스트를 결성해 한국 록의 부활을 선두에서 이끈 로커이기도 했다. 그렇게 만든 밴드 넥스트가 정점을 달리던 무렵, 그는 넥스트로 해볼 건 다 해봤다며 밴드를 깨고 유학을 가더니,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테크노 음악에 매진해 명반을 내기도 했다.

그의 짧은 인생 후반부에 그를 대변했던 이미지는 '독설가' '마왕' '별난 DJ’, 심지어 예능에 출연하는 까불이 캐릭터였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우리 시대가 쉽게 갖지 못하는 정말 탁월한 음악가임에 틀림없다.

신해철은 그의 삶 속에서 많은 앨범을 남겼다. 어느 앨범이 다른 앨범보다 더 우월하고, 어떤 곡이 다른 곡보다 더 좋다는 평가는 위험하다. 신해철의 각 앨범은 그가 당시 맞닥뜨렸던 삶의 여정 속에서 각각의 의미가 있고, 또 앨범에 실린 곡은 시대를 떠나 지금 들어도 여전히 좋다. 누군가는 그가 20대 초반 아이돌 이미지로 소비됐던 시절에 부른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를 최고의 명곡으로 꼽을지 모른다. 넥스트 이후 솔로 앨범에서 남긴 '민물장어의 꿈'이나 넥스트 시절 발라드 넘버였던 '날아라 병아리'가 최고일 수도 있다. 넥스트 시절 하드록 넘버인 '이중인격자'를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앨범은 그의 전 앨범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앨범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의 보컬 역량 최정점에 있을 때 나온 앨범이라는 것이다(보컬 능력은 어느 정도 객관화된 평가가 가능하기에).

신해철은 생전 인터뷰에서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는데 재능이 없어서 보컬이 되었다"고 종종 얘기하곤 했다. 그것은 밴드에서 보컬의 위치를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타고난 톱 보컬에 비해 그의 보컬 역량이 좀 떨어졌다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말한 그 특유의 '겸손'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싶다(거의 대다수 노래를 작사하는 그의 성향으로 볼 때 보컬이 아닌 신해철을 상상하기는 힘들 것 같다).

겉으로는 그렇게 얘기하면서 신해철은 혼자 소리를 질러대며 엄청난 노력을 들였다. 그 결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이 넥스트 두 번째 앨범부터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한 그만의 '가성 샤우팅'이다. 솔직히 말해 정석의 발성은 아니었다. 노래를 전문으로 배우는 입장에서 보면 따라해서는 안되는 발성이었다.

하지만 신해철 입장에서 다른 대안은 없었다. 타고난 베이스 성종을 가진 그는 그가 표현할 수 있는 가짓수의 확대를 위해 그가 가진 음역 훨씬 이상의 고음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가성에 허스키를 입혀 듣는 사람이 매력적으로 들릴 만한 놀랄 만한 샤우팅을 개발해낸다. 다만 정석의 발성은 아니었기에 '중고음'이 비어버리는 치명적인 약점은 있었다. 하지만 넥스트와 신해철은 신해철의 음역대를 최적으로 살릴 수 있는 멜로디를 뽑아낼 역량이 있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넥스트의 고음 샤우팅 전후 구간을 비교하면 그의 진성 한계음인 2옥타브 솔 부근에서 음이 5도 이상 치솟으며 곧바로 3옥타브로 넘어가는 패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성으로 음을 끌고 가다가 음역대가 점프하며 악보가 3옥타브 이상의 음을 찍으면 신해철 특유의 가성 샤우팅이 폭발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런 패턴의 가창이 빛을 발한 곡이 바로 '정글스토리' 앨범에 실린 '절망에 관하여'란 작품이다.

뜨겁던 내 심장은 날이 갈수록 식어 가는데

내 등뒤엔 유령들처럼 옛 꿈들이 날 원망하며 서 있네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자욱씩 떼어 놓지만

갈 곳도 해야 할 것도 또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눈물 흘리며 몸부림치며 어쨌든 사는 날까지 살고 싶어

그러다 보면 늙고 병들어 쓰러질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냥 가보는 거야

내 목을 졸라오는 올가미처럼 그 시간이 온다

내 초라한 삶의 이유를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눈물 흘리며 몸부림치며 어쨌든 사는 날까지 살고 싶어

그러다 보면 늙고 병들어 쓰러질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냥 가보는 거야

여기서 후렴부 '그러다 보면 늙고 병들어 쓰러질 날이 오겠지 하지만' 파트에서 2옥타브 솔의 음이 빈번하게 나온다. 하지만의 '만'에서 2옥타브 솔을 찍은 악보는 바로 다음 음인 그냥 가보는 거야의 '그'에서 3옥타브 도로 점프하고 '그냥 가보는 거야'의 '그'부터는 3옥타브 파로 질주한다.

참고로 고음의 상징인 소찬휘의 'Tears', 스틸하트의 'She’s gone'의 최고음이 3옥타브 솔이다. 박완규가 고음 전성기 시절 불렀던 '론리 나잇'의 최고음은 3옥타브 레#이다. 비록 가성 샤우팅이긴 하지만 허스키와 파워가 실린 신해철의 가창은 그야말로 놀라운 수준이다. 그가 원래 가진 음역대를 거의 1옥타브나 끌어올린 연습의 결과인 셈이다.

이 앨범은 1996년 나왔다. 그룹 넥스트의 두 번째 앨범과 넥스트 첫 번째 은퇴작인 마지막 앨범 사이에 있는 앨범이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신해철은 모든 면에서 이 당시 성대가 가장 짱짱하고 건강했던 시기였다. 가성 샤우팅은 목을 갉아먹는 발성이라 나이가 먹으면 피지컬이 달려 내기 힘든 측면이 있다. 하지만 당시 젊었던 신해철은 '나이'로 목을 갈아넣으며 음역을 확장시킨 셈이다.

이 앨범은 윤도현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정글스토리의 OST로 나왔다. 당시 신인이었던 윤도현은 지방에서 로커의 꿈을 품고 상경해 어려움을 겪는 인물로 나왔다. 신해철은 당시 앨범 속지에 '앞으로 크게 될 윤도현'이라고 적으며 그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영화는 흥행 측면에서 폭망했지만 명반인 앨범이 40만장 넘게 팔려 영화 흥행 성적표를 적자에서 흑자로 돌려놓은 해프닝도 있었다.

앨범을 들으면 보컬 면에서나 작곡 면에서나 쏟아져 나오는 재능을 감당하지 못해 폭발시키는 신해철의 역량이 곳곳에 묻어 있다. 댄스록 느낌을 차용한 '아주 가끔은'은 재기발랄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 잡음과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삽입한 '70년대에 바침'이란 곡은 신해철이기에 만들 수 있는 곡이었다. 앨범의 백미는 산울림의 김창완에게 헌정하는 리메이크 곡 '내 마음은 황무지'라 할 것이다. 선배의 작품을 신해철만의 리메이크 감각으로 바꿔놓은 이 곡은 신해철이 한국 가요계에 미친 영향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OST '정글스토리’에 대해 모르는 팬들도 있을 것이다. 꼭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홍장원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