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답게 살라"..무심코 던진 말에 죽어가는 사람들

유선준 입력 2020. 10. 24. 18:26 수정 2020. 10. 24.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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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대교 중간 상류측 전망대에 설치되어있는 황동 재질의 '한 번만 더' 동상의 모습. 동상은 실의에 빠진 한 남자를 다른 남자가 볼을 꼬집으며 위로하는 장면./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남자답게 살라'는 말 이제는 지겨워요. 제 얘기를 그냥 들어주세요"
세달 전 본지 기자가 만난 대학 신입생 이재형씨(20· 가명)는 "친구·지인들에게서 '남자답게 살아라', '남자답지 못하게 왜 나약하냐' 등의 말을 수백 번 들었다"며 어렵게 이같은 말을 꺼냈다.

최근 재형씨는 서울 마포대교 인근 고수부지에서 생활고를 이유로 한강에 투신했다. 다행히 행인이 구출해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남성성 강조에 인권 파괴..극단적 선택까지
그러나 부모·형제가 없는 재형씨는 마음을 보듬어주는 조력자가 없어 언제든 '일촉즉발'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한강에 투신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어요. 친구와 지인들에게 마음을 토로했지만 '누구나 다 힘들다', '남자답지 못하고 나약하게 그러냐', '가장이 될 남자가 이러면 쓰냐' 등의 남성 중심적인 말이 돌아왔어요"
재형씨는 기자에게 눈물을 보이며 "남성성이 없는 것 같아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더욱 살고 싶지 않다"고 털어놨다.

성적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여성에게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인권 및 인격을 파괴하는 피해가 된다는 점은 그간 사회 문제로 제기돼왔다. 아울러 자살 예방을 하는 데 있어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더욱 자살을 부추기는 악효과만 일어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다수 견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가부장적·남성주의 사회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자살예방과 인권 모두 놓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18년 12월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전국의 만 19~39세 성인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남성의 약 40% 정도가 우리 사회는 남성에게 불평등한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들은 그 이유로 남성을 향해 '남성은 ~해야 한다'는 시선을 꼽는다. 우리 사회 여성을 향해 '여성은 ~해야 한다'는 시선이 심각하듯, 남성을 향해서도 성별 고정관념 문제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남성들에게 꾸준히 성적 편견이 가득한 말이 행해지고 있어 인격모독까지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미국의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토니 포터(Tony Porter)가 만든 '맨박스'라는 용어에 따르면 맨박스는 '남성이면 이 정도쯤은 해야지', '남자답지 못하게 왜 그래' 등 사회적 편견으로 남성의 행동을 제약하게 된다.

또 다른 대학 신입생인 김진현씨(20· 가명)도 과거 학업 스트레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다가 남자답지 못하다는 주위의 편견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진현씨는 "학업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버티지 못할 정도로 힘들다는 얘기를 친구들에게 했는데 '누구나 다 힘든데, 너만 유난 떠냐'는 대답만이 돌아왔다"며 "가뜩이나 힘들어 죽고 싶은데 그런 핀잔까지 들으니깐 학업 스트레스와 남성성 결여라는 생각으로 더 빨리 죽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전문가들은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묵묵히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목소리를 낸다. 남성성 운운하다가는 그들의 힘든 상황에 더해 성적 자괴감까지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간 겪어왔던 힘든 과정을 들어주고 공감을 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인권운동가 이준형씨는 "수천년 간 한국 역사는 남성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지금도 남성들에게 강인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며 "인간은 성별을 떠나 여러 성향의 내재성이 골고루 있기 때문에 남성성만 강제하는 것은 인격 파괴를 하는 것은 물론, 극단적 선택을 부추기는 범죄"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 "들어주고 공감하는 게 중요"
현재 한강 교량들에는 출동감시시스템과 수난구조대 외에도 투신 시도를 막는 'SOS생명의전화'가 있다.

SOS생명의전화는 24시간 대기 상담사와 연결돼 365일 상시 운용된다. 전화 버튼이 총 2개인데, 1개는 투신 시도 목격한 경우 구조대 출동을 위해 마련된 기능(빨간색)과 다른 1개 버튼은 투신 시도자가 전문 상담원과 통화할 수 있도록 마련된 기능(초록색)이 있다.

전문 상담원들은 조언과 충고를 가급적 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며 공감을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1년부터 올해까지 SOS생명의전화 상담 데이터 분석한 결과, 지난 9년간 자살 위기상담은 모두 8113건을 기록했는데 이중 투신 직전의 고위험자를 구조한 건수는 1595명에 달했다.

우혜진 서울 생명의전화 부장은 "상담원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면서 이야기를 들어드리겠다고 대답한다"며 "투신 시도자들은 힘든 마음들을 이야기할 곳이 없었던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같이 해결할 방법들을 찾아서 이야기를 한다거나, 힘든 마음들을 최대한 들어드리면서 털어놓게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취업이 안되는 문제 때문에 울면서 죽고 싶어서 교량에 와서 전화한 경우에는 상담원들이 '요즘 취업이 다들 어렵더라' 등 공감을 하는 말들을 한다"며 "충동적인 선택이 많기 때문에 마음을 가라앉히게 하고 위기를 넘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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