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회사에 출근하는 백수다

송지혜 기자 2020. 10. 2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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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회사인 니트컴퍼니는 월급이 없다. 대신 출퇴근 압박, 명함, 월차 등 회사에서 주는 모든 것이 있다. 백수도 소속감을 가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데서 착안한 회사다.
ⓒ시사IN 조남진10월5일 월요 주간회의를 하고 있는 니트컴퍼니 사원들. 돌쇠, 예이, 아퐁, 지니, 쿵짝, 다지, 마(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10월5일 오전 9시50분, 아퐁이 사무실에 도착했다. 출퇴근 기록기에 카드를 넣어 출근을 확인했다. 이어서 돌쇠, 지니, 다지, 쿵짝, 예이, 마가 들어왔다(이들은 수평관계를 지향하며 서로 별칭을 부른다). 니트컴퍼니 서울역점에는 7명이 함께 일한다. 추석 연휴 이후 닷새 만에 만난 까닭에 그간 등산을 했느니, 윷놀이를 했느니, 머리를 했느니 하는 근황을 주고받았다. 자주 ‘꺄르르’ 웃음이 터졌다. 오전 10시30분, 월요 주간회의가 시작되었다. 돌아가며 지난주에 한 일과 이번 주에 할 일을 발제했다. 돌쇠가 말했다. “지난주에는 정말 중요한 일이 있었어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정주행’했거든요. 꺄. 진짜 재밌어요!” ‘꺄르르’ 웃음과 업무를 조정하는 진지한 목소리가 자주 교차했다. 통상 회사에서 있을 법한 모습이다.

하지만 니트컴퍼니는 가짜 회사다. 일종의 ‘회사 놀이’다. 월급이 없다. 대신 회사에서 주는 모든 것이 있다. 사무실과 ‘출퇴근 압박’, 소속감, 명함, ‘회사카드’로 먹는 밥과 커피가 있다. 무엇보다 함께할 동료가 있다. 이들은 무업(無業) 상태다. 지니는 “저는 주로 회사에서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봅니다”라고 말하고 웃었다.

쿵짝(박은미)은 백수들이 소속감을 갖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난 6월 니트컴퍼니 서울역점을 ‘설립’했다. 아름다운재단에서 지원받아 운영비를 마련했다. 사무실은 코로나19 여파로 빈 게스트하우스를 저렴하게 빌렸다. 작은 방과 거실이 딸린 15평짜리 공간에 월 50만원을 낸다. 자칭 ‘사원’인 이들은 사회공헌팀, 디자인팀, 홍보팀, 회계팀, 대외협력팀 소속으로 나뉜다. 월차는 1개월에 한 번만 쓸 수 있고, 매일 업무일지를 쓴다.

니트컴퍼니의 광고 문구는 ‘월급은 없지만 동료가 있잖아’이다. ‘출퇴근에 강제성이 없는데, 잘 될까?’ 서울역점을 낼 때 공동대표 다지(전성신)의 걱정이었다. 그는 “회사 가기 싫은 날이 있잖아요. 월요일이라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하지만 의외였어요. 결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다들 책임감이 있고 그것을 보여주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공동대표 박은미씨는 10년 넘게 비영리단체, 공공기관, 기업재단 등에서 일했다. 더 큰 회사로 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퇴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임기 여성이라는 이유로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거나 사내에서 불합리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쫓겨나오다시피 했다. 마음이 피폐해졌다. 그리고 다시는 이력서를 쓰지 않았다.

2018년 12월 퇴사 이후, 이듬해 1월 ‘니트생활자’ 블로그를 만들었다. 일할 의지가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에 주체적으로 일상을 사는 ‘생활자’를 더했다. 집이나 도서관, 이따금 카페에서 혼자 고립된 채 생활하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백수 동기들이다.

2019년 1월, 니트생활자의 첫 오프라인 모임은 ‘백수들의 한양도성 걷기’ 프로젝트였다. 사전 답사를 거쳐 단단히 준비했다. 12명이 참석했다. 매월 미술관 관람, 북한산 등반, 한강 산책 등을 함께할 니트생활자를 모았다. 그렇게 10개월 동안 백수 120여 명을 만났다. 이 같은 ‘연결’을 경험하면서 올해 3월, 니트컴퍼니 온라인점을 열었다. 오픈 채팅방을 통해 출퇴근을 알리고 100일 동안 매일 자기 업무를 인증하는 식이다. 랜선 면접을 통해 선발된 100명이 사원으로 ‘입사’했다. 만보 걷기, 산책, 드로잉, 필사하기, 계단 오르기 등 자기가 정한 업무에 ‘성과’를 내면서 성취감을 쌓았다. 하지만 월 1회 만나거나 온라인으로만 만나는 건 근본 해결책이 아니었다. 지난 6월, 사무실을 얻어 니트컴퍼니 서울역점을 꾸렸다.

ⓒ시사IN 조남진니트컴퍼니 직원들이 각자 명함을 보여주고 있다.

백수의 가장 큰 적은 고립감

일상의 고립감은 백수의 가장 큰 적이자 동지다. 시간 관리는 매우 중요한 이슈다. 조금만 게을러지면 일상이 무너지고 자괴감이 생기며 스스로 위축된다. 점점 사회와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어진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크다. 벌어놓은 돈으로 생활비를 쓰다가 잔고가 떨어지면 불안한 마음으로 ‘급하게’ 재취업하고 만다. 그러면 퇴사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15~34세 청년 열 명 중 한 명은 니트족이다. 남재량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6월24일 보건복지부 ‘저출산·고령화 대응을 위한 인문사회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2019년 15~34세 청년 비구직 니트는 111만6000명이다. 올해 1~5월 비구직 니트 규모는 53만명으로 15~34세 전체 인구의 10.4%를 차지하며,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면 올해 전체 비구직 니트 규모는 127만3000명에 이른다.

니트족도 ‘니트’가 되기 전에는 일을 했다. 퇴사자 10명에게는 퇴사 사유 10가지가 있다. 더 나은 환경에서 꿈을 펼치기 위한 퇴사는 ‘건강한’ 편이다. 몸이 망가지거나 계약이 끝나 퇴사하는 경우도 많다. 이전 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심리적으로 다시 일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기도 한다. 니트컴퍼니 직원 돌쇠는 6개월간 임금체불을 당하다 끝내 회사를 그만두었다. 예이는 착오로 쓴 회삿돈 1만원 때문에 사측으로부터 배임 혐의로 고발을 당했다. 스물다섯 살, 첫 직장에서였다. 합의한 뒤, 퇴사했다. 지니는 1년 동안 자기소개서를 200군데에 보냈다. 서류 탈락, 1차 탈락, 2차 탈락, 최종 탈락, 정규직 전환 채용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일을 덜 하려고 꾀부리지 않았는데, 달려가다가 돌부리에 크게 넘어진 것 같았다.

백수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하지만 박은미씨가 보기에 백수도 무기력한 생활을 극복하고 소속감을 느끼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법과 제도는 ‘의욕적인 개인’이 ‘직장에 취업’하는 데만 목표를 둔다. 정부 프로그램은 대체로 단기성이다. 취업컨설팅 박람회에 가더라도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해야만 효과적이다. 당장 취업하기 힘든 상태에 놓여 있거나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청년은 배제된다.

아쉽게도 니트컴퍼니 서울역점은 10월9일 폐업한다. 온라인점은 유지된다. 문제는 역시 공간 운영비용이다. 박씨는 백수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줄 곳을 찾아 또 제안서를 쓴다. “진로는 평생 고민해야 할 일이 됐잖아요. 무업 기간에 백수들이 내면의 힘을 길러 다음 스텝을 밟아나갈 수 있는 완충지대가 되도록 끝까지 버티고 싶습니다”라고 박씨는 말했다.

송지혜 기자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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