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만든 '백신 공포', 방역 흔드는 바이러스 되다

정철운 기자 2020. 10. 2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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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학생 사망 이후 무분별한 제목 뽑기로 불안 증폭, 예방접종 시스템 흔들어 '사망자 중 백신 접종자'로 백신 위험성 측정하는 오류 빠져…기자협회 "자성해야"

[미디어오늘 정철운 기자]

지난 16일 인천에 거주하는 17세 학생이 사망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언론에 의해 '백신 공포'를 촉발시킨 사건으로 둔갑했다. 학생의 사인과 백신 접종과의 연관성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은 독감 접종 후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식의 보도를 계속했다. 앞서 냉장 상태를 유지해야 할 백신이 상온에서 유통된 사실이 적발되는 등 일련의 사건이 '스토리'로 더해지며 '공포'는 극대화됐다.

그리고 지난 27일 국과수 부검결과를 바탕으로 한 인천 미추홀구경찰서 발표에 따르면 17세 학생의 사인은 '독극물 중독'으로 드러났다. 아질산염이 치사량으로 검출된 것. 질병관리청이나 대한백신학회 등 정부부처와 전문가집단은 백신과 사망 사이 인과관계가 없다고 반복해서 강조했으나 이미 퍼져버린 공포와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시작은 10월19일(월)이었다. 이날 하루 동안 네이버에서 '독감 백신 사망'으로 검색되는 기사는 328건이다. 사실상 첫 보도는 이날 오후 2시30분 경 출고된 '[속보] “독감백신 접종 뒤 10대 사망 사례 보고…사망 원인 조사중”'이란 제목의 한 줄짜리 연합뉴스 기사였다. 이후 '[속보] 독감백신 접종 뒤 17세 사망…당국 “인과관계 없지만 부검 중”'(머니투데이)처럼 비슷한 제목의 기사가 올라갔다. 대부분 중앙방역대책본부의 코로나19 정례브리핑 결과를 인용했다.

▲조선일보 10월22일자 1면.

그리고 다음날인 20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제목은 '무료 독감백신 맞은 18세 돌연사…정부는 사흘 뒤에야 공개'였다. '백신', '돌연사', '사흘 뒤 공개'라는 키워드가 더해지며 “젊은 청년이 백신을 맞고 갑자기 사망했는데, 정부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식의 서사가 형성됐다. 다음날인 21일자 중앙일보 2면 톱기사 제목은 '고창 70대, 대전 80대 접종 뒤 사망…독감백신 불안감 확산'이었다. 그리고 22일자 조선일보 1면 톱기사 제목은 '엿새간 10명 사망, 독감백신 쇼크'였다. 같은 날 중앙일보 1면 톱기사 제목도 '독감백신 사망 10명, 정은경은 “접종 계속”'이었다. 다른 언론보도 역시 이 같은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우주 고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21일 KBS '뉴스9'에서 “백신 접종이 독감으로 인한 사망 위험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강조했고,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 는 22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언론 보도로) 백신 접종률이 떨어지면 코로나와 인플루엔자가 동시 유행하고, 인플루엔자에 의한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률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질병관리청은 폐렴 등 다른 기저질환으로 숨진 환자까지 감안했을 때 한 해 독감 사망자가 3000여명 수준이라며 '진화'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보도 빅데이터시스템 '빅카인즈'에 따르면 10월16일부터 10월28일까지 '백신'이 들어간 기사의 연관어 분석 결과 △사망자 △사망 사례 △사망 원인 △불안감 △연관성 등의 단어가 비중있게 등장했다. 이 기간 '백신'이 들어간 기사는 4265건으로 나타났으며 이 중 '백신'과 '사망'이 포함된 기사는 2664건으로 절반 이상이었다. 주요일간지의 경우 중앙일보가 143건인 반면 한겨레는 40건에 그쳐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백신', '사망', '불안' 세 단어가 모두 포함된 기사도 535건으로 적지 않았다.

▲'백신' 관련 보도 연관어 검색 결과. ⓒ빅카인즈.

독감 백신과 관련 최근 언론 보도를 두고 카이스트(KIST) 경영공학과 석사과정의 강태영씨는 유튜브채널 '언더스코어'에서 왜곡과 오류를 지적했다. “5000만 명의 한국인 중 사망자는 일 평균 750명이다. 일주일이면 5250명이다. 이 사망자 중에서 백신 접종자로 보도된 사람들(16일~22일)은 25명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성인 3명 중 1명이 인플루엔자 백신을 맞고 있다. 최종적으로 백신을 맞았을 때 사망할 확률은 0.00015%다.”

언론은 백신을 맞은 사람 중 몇 명이 사망했는지를 봐야 했지만, 사망자 중 백신을 맞은 사람의 수를 근거로 백신의 위험성을 측정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강씨는 “이번 이슈는 인과와 상관을 오해했기 때문에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식으로 언론이 불안감만 높이면 예방접종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가 낮아진다”고 지적했다. 언론은 독감백신 접종 시 주의해야 할 점을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했지만, 오히려 접종 이후 사망한 사람들만 찾아 보도하는 식으로 백신 접종을 방해하는 일종의 '바이러스' 같은 존재였다.

이와 관련 김원장 KBS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①어르신 사망 ②독감백신 접종 여부 질문 ③맞았다면 ④'독감백신 맞은 노인 또 사망'이 “우리 언론의 독감 사망 보도 알고리즘”이었다고 꼬집었다. 앞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70세 이상 노인 20만4000명이 사망했는데 그들 중 절반 정도는 백신을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김 기자는 최근의 언론보도가 '지난해 노인 10만2000명 독감백신 맞고 사망'과 같은 수준이라고 지적하며 “백신의 불신이 커지면 서로 백신을 맞지 않으려 하고 결국 모두가 피해 보는 구조가 된다”며 “언론의 위험한 제목뽑기는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게티이미지.

사태가 심각해지며 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회는 지난 27일 '인플루엔자(독감) 관련 보도·방송 지침'을 냈다. 지침에는 △국민의 불안을 불필요하게 키울 수 있는 자극적인 표현 등을 삼간다 △인플루엔자 백신과 사망 원인 간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제목 등에 '독감 사망자 수',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사망자 수'처럼 지나친 축약형 문장을 사용해 혼란을 주지 않는다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후 사망신고' 통계만을 단순 중계식으로 보도하는 것은 막연한 불안감을 키울 수 있으므로 신중을 기한다. △흥미 위주의 보도와 방송을 지양하고, 미확인된 정보나 괴담식 소문을 인용 또는 보도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한국기자협회는 28일자 기자협회보 사설을 통해 “백신 사망자 증가가 실제로 관련 사망자가 증가했기 때문인지 신고사례의 증가로 인한 착시현상인지, 기저질환의 유무나 사망자 연령대와의 관련성 등을 복합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었으나 매체 거의 대부분은 사망자 숫자 중계방송식 보도에 치중했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한국기자협회는 “방역당국과 전문가 다수가 백신 접종과 사망과의 인과관계가 희박하다고 여러 차례 지적했음에도 언론이 백신 공포를 부추긴 점은 유감”이라며 “백신보도에 보다 과학적이고 차분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질병관리청으로부터 받은 국가예방접종 지원사업 백신 폐기 현황에 따르면 보건소가 최근 3년간 구입한 백신 4만5295도즈가 유효기간 경과, 냉장고 고장 등 사유로 폐기된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에는 전체 백신 구매 물량 중 0.34%를 폐기했고, 2018년은 1.09%를 폐기했으며, 2019년에는 1.11%를 폐기했다. 사유는 유효기간 경과(52.9%), 냉장고 고장(25.6%) 등 순위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정부는 백신 관리에 더욱 철저해야 하고, 언론은 예방접종 시스템을 흔드는 위험한 보도행태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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