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대만 TSMC를 이기기 어려운 5가지 이유

최원석 국제경제전문기자 2020. 10. 2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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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의 디코드]

※디코드(decode): 부호화된 데이터를 알기 쉽도록 풀어내는 것. 흩어져 있는 뉴스를 모아 세상 흐름의 안쪽을 연결해 봅니다. ‘뇌피셜’이 넘쳐 죄송합니다!

삼성이 TSMC를 이기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를 아래의 5가지로 정리해봅니다.

1. TSMC 버전의 초격차 기술전략

2. 제조장치 기업 ASML과 TSMC의 팀플레이

3. 일본 제조장치 기업과의 협업 부족

4. 인텔과 TSMC의 밀월 가능성

5. 삼성의 올라운드 전략 vs. TSMC의 란체스터 전략

삼성전자의 EUV 파운드리 공장. 올해 초 경기도 화성에 세워졌다.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왜 최근에 네덜란드 출장을 갔을까요? 그리고 왜 “조만간 다시 일본에 가야 한다”고 말했을까요? 안팎으로 이 어려운 시기에 굳이 말입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보겠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삼성전자가 대만 TSMC와의 경쟁에서 밀릴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입니다. 이 부회장이 내건 ‘2030년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세계 1등 전략’을 달성하려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foundry·반도체수탁생산) 부문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해야 하는데요. 아시다시피 이 분야 원톱이 파운드리 전문회사 TSMC죠. 전략 실행을 위해선 TSMC와의 격돌이 불가피합니다.

일단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반도체 비즈니스를 간단히 설명 드릴게요. 반도체는 시스템 반도체, 메모리, 파운드리 이렇게 3개 분야로 나뉩니다. 시스템 반도체는 컴퓨터의 두뇌역할을 하는 칩을 설계하는 것이죠. 미국 엔비디아·퀄컴 등이 대표적입니다. 공장(fab) 없이 설계만 한다고 해서 팹리스(fabless)라고도 부릅니다. 인텔 같은 회사는 팹리스와 파운드리를 함께 합니다. 팹리스로는 여전히 최강이지만 최근 파운드리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죠. 메모리는 삼성전자가 원톱입니다. 그 다음이 최근에 인텔 메모리 부문까지 인수한 SK하이닉스입니다. 한국 업체들의 텃밭이죠. 그 다음은 파운드리. 앞서 말씀드린 팹리스들이 발주를 하면 그들 설계대로 대신 생산해주는 사업입니다. TSMC가 오랫동안 세계 시장의 절반을 차지해 왔고요. 최근 삼성전자가 2등까지 올라왔지만 여전히 점유율은 20% 미만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럼 이제 파운드리 비즈니스에서 삼성전자의 상황이 심각할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괜찮아 보입니다. 메모리는 세계최강이고요. 게다가 파운드리도 2등이지 않습니까. 팹리스는 아직 약하지만 갤럭시폰에 들어가는 AP(Application Processor·모바일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칩)도 자체설계가 가능하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파운드리에서 TSMC를 따라잡는 것, 즉 현재의 압도적 1등과의 시장점유율 격차를 좁히는게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겁니다. 심하게 말하면, 삼성이 그토록 강조하는 초격차 전략 즉, 경쟁자를 기술적으로 압도해 추격 의지를 상실케 하는 전략을 역으로 TSMC가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칫 잘못하면 TSMC의 초격차 전략에 삼성의 파운드리 부문이 계속해서 밀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파운드리의 특성상 가장 첨단의 기술을 가진 회사로 1류 팹리스들의 수주가 몰릴 수 밖에 없고, 수주가 몰리면 그것이 또 기술·자금력 강화로 이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이지요. 이미 TSMC가 그들의 전문인 파운드리 분야에서만큼은 적어도 삼성전자와 초격차를 벌릴 수 있는 단계로 가고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물론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죠. 어차피 메모리는 삼성이 1등. 파운드리 부문도 초미세공정 경쟁에서는 이미 다른 곳들이 사실상 탈락하고 TSMC와 삼성전자의 양강 구도로 압축된 상황이거든요. ‘TSMC가 이미 세계시장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데 점유율을 더 높이려 할까?’ ‘어차피 TSMC가 절반을 유지하더라도 삼성전자가 세계시장 점유율을 계속 높여 30~40% 먹으면 되지 않을까?’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그간의 행보와 저력으로 볼 때, TSMC 추격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만만치 않죠.

하지만 저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삼성전자의 저력을 잘 아는 TSMC가 삼성의 추격 의지를 꺾기 위해 더 맹렬히 공격해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격화될 삼성전자와 TSMC의 전쟁 결과가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TSMC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경쟁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 제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속단은 금물일 겁니다. 다만 삼성의 파운드리 전략에 어떤 어려움이 있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왜 쉽지 않은지를 5가지로 설명 드려보겠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이재용 부회장이 네덜란드로 간 이유, 두번째 이유는 이 부회장이 일본에 다시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와 연결돼 있습니다.

◇1. TSMC 버전의 초격차 기술전략

파운드리의 첨단기술 경쟁력은 반도체 회로의 선폭(線幅)을 얼마나 정밀하게 그릴 수 있느냐 달려 있습니다. 미세가공이라 부르는데요. 선폭이 나노(10억분의1)미터 단위까지 가 있는 상황이죠. 나노미터의 숫자가 적을수록 기술력이 더 높고, 그 기술력을 가진 파운드리 업체에 첨단 설계의 반도체 수주가 몰리는 구조입니다.

파운드리 원톱이라는 TSMC 상황은 어떨까요? 2019년에 7 나노미터 공정 중 최고 수준 제품, 올해 들어 5 나노미터 제품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3나노미터 제품도 현재 대만에 공장 건설이 진행되고 있고, 2022년 하반기 양산 예정입니다. 현존하는 기술력의 극한으로 여겨지는 2나노도 2024년 양산을 목표로 현재 공장부지를 확정한 뒤 연구개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상황은 어떨까요? 삼성전자는 2019년 7월, 갤럭시 노트 10용 AP인 엑시노스 9825에 7나노 공정을 적용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에도 2019년 후반 6나노, 올해 5나노 성공 등 숫자로만 보면 TSMC에 그리 뒤지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다소 의문이라는 전문가가 있습니다. 바로 유노가미 다카시(湯之上隆) 미세가공연구소 소장입니다. 히타치·엘피다메모리 등을 거치며 20년 넘게 반도체 미세가공 분야에서 일했던 유노가미 소장은 일본 반도체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한 ‘일본전자·반도체 대붕괴의 교훈’의 저자이기도 하죠. 자국 기업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 최고의 반도체 미세가공 전문가의 분석을 일부 인용해 보겠습니다.

유노가미 소장은 삼성전자의 5나노 양산능력을 미완성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즉 TSMC는 양산 성공이지만, 삼성전자의 경우 실패는 아니나 완전 성공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근거로 수율(전체 생산에서 제품 출하가 가능한 고품질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좋지 않아 양산이라 말하기 애매하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TSMC와 삼성전자의 명암은 어디에서 갈라졌고, 그 차이는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요?

명암은 5나노 제품을 만들려면 반드시 필요한 핵심 제조장치인 EUV(Extreme Ultra Violet·극자외선)에서 갈립니다. 우선 TSMC 상황부터 설명 드리죠. EUV는 새로운 제조장치로, 이런 새 장치를 잘 다루려면 상당한 기간이 걸립니다. 특히 EUV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정밀한 장치로 불릴만큼 섬세한 기계입니다. EUV는 5나노 이하의 첨단 반도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만큼 양산에 안착하기 전까지 시험과정에서 버리는 제품의 양이 매우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는 것이죠. 보통 이런 제조장치를 잘 다루기까지 길게는 5~6년도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TSMC가 EUV를 잘 다루기 위해 5~6년을 투입한다는건 말이 안되겠죠. 복수 관계자들의 정보를 종합한 유노가미 소장에 따르면, TSMC는 2018년에 7~8대의 EUV에 매월 6~8만장의 웨이퍼를 투입해 양산 적용을 위한 시험생산을 실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매월 최대 8만장이라고 하면, 1년간 100만장의 웨이퍼를 EUV에 투입해 이것을 모두 폐기 처분하면서까지 양산에 총력을 쏟았다는 것이죠. 그만큼 양산 적용에는 엄청난 양의 웨이퍼 투입과 시간·자금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럼 삼성전자는 어떤 상황일까요. 삼성전자는 2018년 파운드리 거점인 화성 반도체 공장에 EUV 8대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파운드리 규모로 보면, 12인치 웨이퍼로 환산할 때 TSMC가 월 120만장 이상인데 비해 삼성전자는 30만장 규모로 추산됩니다. 이 정도 규모에서 TSMC와 같은 규모로 EUV 양산 적용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 있다는 겁니다. 이미 실제 고객을 대상으로 제품을 찍어내고 있는 공장 가동을 멈추고서 시험 생산에 집중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삼성전자는 EUV 트레이닝을 위해 D램 양산공장을 빌려 쓰고 있다고 합니다. 삼성은 월 50만 장의 거대한 D램 라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월 3000장~최대 1만장을 EUV 트레이닝용으로 빌려 쓰고 있다는 거죠.

또 삼성전자는 지난 5월 “EUV에서 제조한 10나노급 D램 출하 개수가 100만 개에 달했다”고 밝힌 적도 있는데요. 이것에 대해서도 유노가미 소장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현재 D램은 12인치 웨이퍼 한 장에서 1500개 가량이 동시 생산됩니다. D램 100만개라면, 수율 80%로 계산했을 때 웨이퍼 숫자로는 833장이 됩니다. 즉 100만 개의 D램이라는 숫자는 월 50만 장의 웨이퍼를 생산하는 거대한 D램 라인을 가진 삼성전자에서 웨이퍼 1000장도 안 되는 규모라는 것이지요. 비율로 따지면 0.17% 밖에 안 됩니다. 따라서 삼성전자가 “EUV를 이용해 만든 D램을 출하했다”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업계 상식에 비춰보면 “EUV를 D램 양산에 썼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유노가미 소장은 지금 삼성전자 상황을 “시스템 반도체 양산에 EUV를 적용하고 싶지만, 트레이닝 장소를 확보할 수 없어 거대한 D램 라인을 잠깐 빌려 쓴 결과, 100만개 정도 동작하는 D램이 생겼다”는 정도일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즉 TSMC의 EUV 양산 수준과 비교하면 아직까지 큰 격차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네덜란드 기업 ASML이 독점 공급하고 있는 반도체 제조장치 EUV. 대당 가격이 2000억원에 달한다. /ASML

◇2. 제조장치 기업 ASML과 TSMC의 팀플레이

앞서 TSMC와 삼성전자의 초미세공정 경쟁의 핵심에 EUV라는 반도체 핵심 제조장치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바로 이 부분이 이재용 부회장이 최근 네덜란드로 긴급 출장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연결됩니다. 이 부회장은 네덜란드로 날아가 EUV 공급업체인 ASML 경영진을 만났는데요. 다른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핵심은 단 세가지입니다. “삼성전자에 EUV를 더 많이 달라” “그리고 더 빨리 달라” “삼성전자가 도입한 EUV를 더 잘 다룰 수 있게 더 많은 지원을 해달라”.

네덜란드 ASML은 EUV라는 초미세공정에 필수인 제조장치를 만드는 유일한 곳입니다. 모든 서플라이어들의 로망, 세계시장 점유율 100%를 자랑하는 ‘갑 위의 수퍼 을’인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EUV라는 장비를 다루는 실력에서 삼성전자가 아직 TSMC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데요.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파운드리 분야에서 TSMC를 따라잡기 위해, 파운드리의 기존 거점인 화성이 아니라 메모리 거점인 평택에 EUV 전용 공장을 짓고 2025년까지 EUV 100대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난관에 부닥친 겁니다. 그 이유는 ASML의 EUV 제조 능력이 수요를 못따라간다는데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초미세공정 경쟁은 TSMC와 삼성전자의 양강으로 압축됐으니, EUV 발주처는 TSMC와 삼성전자가 거의 전부이겠죠? 그런데 세계에서 유일하게 EUV를 만들 수 있는 ASML의 EUV 생산량이 2016년 5대, 2017년 10대, 2018년 18대, 2019년 26대에 불과했고, 올해도 총 36대 출하가 한계라는 겁니다. 받아놓은 수주 대수는 점점 늘어나 올해 2분기 기준 56대에 달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EUV는 대당 가격이 2000억원에 달하는 초고가 장비입니다. 네, 한 대에 20억, 200억원이 아니라 무려 2000억원 짜리입니다. 10대만 사도 2조원이죠. 이런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라도 하루빨리 더 많이 사오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릴 수 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에 삼성전자가 놓여 있는 겁니다.

더 심각한 것은 올해 ASML이 생산하는 36대의 EUV 대부분이 TSMC로 가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삼성전자가 확보한 EUV는 이 가운데 몇 대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올해 말 시점에서 각사의 EUV 누적 보유 대수는 TSMC가 60여대, 삼성전자는 10여대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 후에도 TSMC는 EUV를 매년 20~30대씩 도입, 2025년 말엔 200대 가까이 보유한다는 계획입니다. 삼성전자도 2025년 말까지 100대의 EUV 도입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ASML의 제조 능력을 감안할 때 가능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이 네덜란드까지 날아가 ASML측과 담판을 지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성과가 어느정도 나올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이미 TSMC에서 EUV를 사용한 5나노 공정 생산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애플·AMD·퀄컴·엔비디아 같은 전세계 톱클래스 기업으로부터의 수주량이 넘쳐나고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삼성전자는 아직 트레이닝이 더 필요한 상황이죠. 그러니 ASML 입장에서 ‘잘나가는 집’에서 더 달라는 부탁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당장 일을 해야 하니 물건 달라고 하는 쪽이 먼저인거죠. 게다가 ASML이 주판알을 굴려보니 앞으로도 TSMC가 계속 더 잘할 것 같거든요. 그러니 오래오래 물건을 사줄 것 같은 물주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밖에 없겠죠.

두번째는 ASML의 EUV 개발에 TSMC가 초기부터 관여했다는 것입니다. TSMC는 오로지 파운드리만 합니다. 그래서 파운드리의 단순 생산뿐 아니라 관련 분야에도 아주 넓고 깊은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요. 이런 기술을 패키지로 제공함으로써 고객사를 매혹시키는 것이 TSMC의 숨은 경쟁력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두 회사가 단순히 물건만 사고 파는 관계가 아니라는 거죠. 신뢰 관계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삼성전자가 치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ASML은 TSMC와 삼성전자의 EUV 확보 전쟁 덕분에 사상최고 실적을 내고 있습니다. ASML의 올해 3분기 실적은 작년 동기보다 33%, 전 분기보다 19% 늘어난 40억유로로 직전 전망치(36억~38억유로)를 크게 넘어섰습니다.

◇3. 일본 제조장치 기업과의 협업 부족

이재용 부회장이 네덜란드 출장에서 돌아온 뒤 '조만간 일본도 다시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이 반도체 제조장치 강국이기 때문이죠. 세계 반도체 제조장치 기업 톱10중 6곳이 일본 기업입니다. 다만 EUV에서만은 네덜란드 ASML에 100% 독점을 내준 상황이죠. EUV는 반도체의 핵심장비인 노광장치 중 최첨단인데요. 옛날에는 노광장치 세계시장을 일본 니콘·캐논이 석권했지만, ASML과의 경쟁에 져 EUV 개발을 포기함으로써 현재는 EUV 뿐 아니라 노광장치 전체 시장 점유율에서도 ASML에 많이 밀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기업의 중요성은 여전하지요. EUV 제조는 ASML 독점이지만, EUV에 들어가는 여러 고가·첨단 부품은 일본이 독과점한 경우가 많습니다. 도쿄일렉트론은 실리콘 웨이퍼에 특수한 액체를 도포해 현상하는 장치가 강한데요. EUV용 도포·현상 장치는 100% 도쿄일렉트론이 공급합니다. 레이저텍이라는 일본 기업은 노광장치에 필수인 마스크 검사장치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100%입니다. EUV에도 당연히 100% 레이저텍 제품이 들어갑니다. 또 현재 EUV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은 ASML뿐이지만, EUV의 핵심인 전용 광원(光源)을 만들 수 있는 곳은 ASML 이외에 기가포톤이라는 일본 기업이 있습니다. ASML의 차세대 EUV에는 더 강력한 출력의 광원이 필요한데요. 기가포톤은 ASML이 2022년 개발 예정인 차세대 제품에 들어갈 광원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점이 생깁니다. 복잡한 정치적 이유로 한·일간 반목이 심해지고, 공방의 결과로 삼성전자 등이 핵심 소재를 국산화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는데요. 물론 소재 국산화를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문제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게 심각합니다.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더 강해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는 과정이 매우 복합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삼성전자가 당장 절실한 EUV를 빨리 확보하는데는 ASML 뿐 아니라 수많은 일본 기업이 얽혀 있다는 것이지요.

또 장기적으로 봤을 때 ASML이라는 단 한 곳의 업체에 핵심 중의 핵심인 반도체 장비를 100% 의존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어떤 해법이 있을지 찾으려 할 때 일본 기업과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EUV 경쟁에서는 탈락했다고 해도 니콘·캐논은 그 아랫급 노광장치를 생산 중이고요. 개발능력도 살아 있습니다. 니콘·캐논은 디지털카메라 사업이 쪼그라들면서 신규 매출이 절실한 상황이지요. 노광장치에서 ASML을 타도하기 위해 신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EUV가 아닌 첨단 노광장치를 개발해 새로운 국면을 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삼성으로서도 ASML 이외에 노광장치의 미래를 기댈 곳은 니콘·캐논 정도 밖에 없습니다.

EUV는 삼성전자·TSMC 뿐 아니라 중국의 SMIC 같은 파운드리도 절실하게 원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ASML에 압력을 넣어 못팔게 하기 때문에 중국은 아직 EUV를 손에 넣지 못하고 있죠. 이 때문에 중국에서 물 밑으로 일본 장비업체들에 돈을 싸들고 와서 새로운 장치 개발을 협력하자고 하는 일도 빈번하다고 합니다.

대만에 있는 TSMC 파운드리 공장 내부

◇4. 인텔과 TSMC의 밀월 가능성

파운드리 업계의 3강이라고 한다면 TSMC·삼성전자·인텔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인텔이 초미세공정 경쟁에서 사실상 탈락했다고 말씀드렸죠. TSMC가 5나노 양산, 향후 3나노, 2나노를 계획 중이고, 삼성이 7나노 양산, 5나노 양산 임박인데 비해 인텔은 현재 14나노이고요. 10나노 양산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7나노 계획도 계속 지연되고 있죠. 그래서 생산을 외부에 위탁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는 발표도 있었습니다.

인텔의 위탁 분량이 삼성전자로 간다면 매우 좋은 일이겠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이구요. 인텔이 TSMC와 삼성에 물량을 배분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인텔이 이미 자사 GPU 생산을 TSMC에 위탁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인텔과 TSMC의 협력이 강화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인텔은 앞으로도 자사의 PC·서버용 CPU에 대해서도 현재 TSMC만 가능한 5 나노, TSMC가 준비중인 3나노에 위탁하는 것을 협의 중이라는 보도도 있습니다.

또하나 걸리는 것은 TSMC가 미국에 짓고 있는 신공장이 애리조나주 챈들러(Chandler)에 위치해 있다는 겁니다. 챈들러는 인텔 반도체 제조의 본산입니다. 게다가 인텔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수주한 10억달러짜리 미 국방부 클라우드서비스의 서버용 핵심부품을 납품할 예정인데요. 인텔 CEO가 최근 미 국방부 차관에게 “TSMC와의 협력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이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낸 것이 언론에 유출되기도 했었죠.

즉 미국이 중국 견제 전략상 대만을 선봉에 세워야 하기 때문에, 대만 정부와 TSMC를 전폭 지원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TSMC는 미국의 제재조치에 따라 매출의 15%를 차지하던 화웨이 물량이 10월부터 완전히 빠졌는데요. 미국은 빠진 화웨이 물량보다 더 많은 미국 업체 물량을 TSMC에 안길 것으로 보입니다.

ASML도 중국에는 EUV를 안팔고 있죠. EUV에 미국 특허를 많이 쓰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ASML이 TSMC의 EUV 요청에 최우선 대응할 수 밖에 없는 뒷배경에 미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만, 이것이 일부 사실이라고 한다면 삼성전자에 결코 유리하지 않겠죠.

◇5. 삼성의 올라운드 전략 vs. TSMC의 란체스터 전략

삼성전자와 TSMC의 극한경쟁에서 또 걱정되는 것은 삼성은 올라운드 전략이고, TSMC는 란체스터 전략이라는 겁니다.

란체스터 전략이란, 영국의 항공공학 엔지니어인 프레드릭 란체스터가 1차대전 당시 공중전 결과를 분석해 발견한 법칙을 기반으로 한 경영전략입니다. 핵심은 ‘수적으로 우세인 쪽과 열세인 쪽의 실제 전력(戰力) 차이는 수적 차이보다 훨씬 큰 차이로 커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능이 같은 아군 전투기 5대와 적군 전투기 3대가 공중전을 벌여서 적군 전투기 3대가 모두 격추될 때까지 살아남는 아군 전투기 대수는 5에서 3을 뺀 2대가 아니라, √(5²-3²), 즉 √(25-9)=4대라는 것이지요.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이 법칙을 활용해 큰 전과를 올렸고요. 1960년대 일본 경영학자 다오카 노부오가 ‘란체스터 전략 입문’을 펴내면서 일본 경영자 사이에 크게 유행했습니다. 이 전략의 결론은 ‘적이 아무리 강해보일지라도 적이 지키는 전선(front line)의 일부분에 우리의 모든 전력을 집중하면 이길 수 있다’입니다.

이를 삼성전자와 TSMC의 싸움에 대입해 본다면 어떨까요? 삼성전자는 올라운드 플레이를 해야 합니다. 메모리에선 SK하이닉스가 총공세를 펼치고 있으니 수성 혹은 더 적극적인 공격에 나서야 겠죠. 스마트폰에서는 애플과 격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으니 대응책이 절실하겠죠. 특히 제품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구독경제·데이터플랫폼 쪽으로 고민이 큽니다. 가전에서도 LG·중국산과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죠. 범용 디스플레이는 이미 중국으로 넘어갔지만, OLED 등 고부가치 제품은 빼앗길 수 없습니다. 소니에 이어 세계시장 점유율 2위인 이미지센서에서도 피튀기는 경쟁을 해야 합니다. 이런 와중에 스마트폰 AP도 퀄컴 등과 경쟁해야 하고, 특히 미래 먹을거리인 AI 반도체에서도 시장을 개척해야 하지요.

이런 수많은 전선을 다 책임지면서, 파운드리에서는 TSMC와 끝장 승부를 봐야 하는 상황인 겁니다. 다양한 전선에서 싸우는 종합 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삼성의 대단함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얘기하면 전선이 너무 넓다는 겁니다.

반면에 TSMC는 EUV 초미세 공정 싸움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있죠. 삼성전자의 그 넓은 전선의 한 부분에 전력을 집중해 돌파하려는 것, 란체스터 전략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TSMC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대만 차이잉원 정권과 중국의 굴기를 꺾으려는 미국의 안보·경제 협력에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지요. 또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본의 반도체 소재·부품기업들도 TSMC를 물밑에서 지원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이대로 물러날리는 없습니다.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허를 찌르는 기술적·전략적 돌파구로 난관을 극복해 낼 가능성도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TSMC와의 초미세공정 경쟁에서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고요. 또 성원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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