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4년, '평등‧공정‧정의' 안녕한가?

입력 2020. 10. 3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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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칼럼] "국민 모두의 대통령 되겠다"는 말은..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ccr21@hanmail.net)]
2016년 10월 29일 첫 촛불집회 후 만 4년이 지났다. 그동안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고 촛불을 지지하는 시민들에 의해 문재인 정권이 탄생했다. 현 정부는 스스로를 촛불정부로 불렀고, '촛불'은 한국사회 전반의 틀을 바꾸자는 시민적 열망의 상징이자 정치적 기호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4년 후 오늘 '촛불'은 시민들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을까.

반공 이데올로기와 성장지상주의의 이종 교배로 생성되고 축적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들, 일상화된 부정의와 불의들, 편법과 반칙들을 제도화를 통해 완화할 수 있거나 최소한의 동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을 때 그 정부는 명실상부하게 '촛불정부'로 부를 수 있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헌법을 농단한 불의한 세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그 출발은 될 수 있을지언정 촛불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담지할 수 없다.

시민에 의해 출범한 정부는 시민을 위한, 시민의 정부가 될 것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나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도 나의 국민"이라며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말은 국민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고, 공공선을 향한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다는 상징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수구‧강경으로 표현되는 세력과 현 정권을 지지하는 강고한 지지층 사이의 간극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됐고, 어느 시대보다 진영 대립의 골은 깊어졌다.

오늘의 정치를 분석할 수 있는 적절한 분석틀은 무엇일까. 군사권위주의 시절의 '민주 대 반민주' 또는 한국정치를 관통했던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의 구도는 낡은 구분이다. 지금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분석틀이 아니다.

그렇다면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구도로 한국정치의 오늘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역시 현실을 설명하는데 한계를 드러낸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됐다고 하지만 상대를 경쟁자가 아닌 적으로 보는 오늘의 현실에서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기득권 대 반기득권의 구도도 마치 집권세력이 기득권에서 자유로운 세력으로서 절대선을 담보한다는 오해를 줄 수 있어 역시 부적절한 프레임이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가 지향할 보편적 가치에 동의한다. 그러나 '팬덤 정치'로 표현되는 극단의 외피를 쓴 정치가 한국정치를 규정하는 주요인자로 부각됐다.

강경 지지층의 결집이 선거승리와 연결된다는 믿음은 정치가 더욱 형해화되고 왜소화되는 역설을 낳는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예외가 아니다. 정당과 정치현장의 플레이어들은 진영 내에서의 격리와 배제를 의식하고, 과잉 액션과 발언으로 정치생명을 연장하고 창출하려 한다. 특히 집권세력의 일사불란한 단일대오는 과거 박근혜를 지지했던 강경보수의 이항대립자로서 설정된다.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가 임기 5년 동안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차기나 차차기 정권이 사회를 혁신할 수 있는 기초는 다져야 퇴임 시 촛불정권이라는 말에 부합했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서도 한국이 선방하고 세계적인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이른바 K방역은 성공적이다. GDP 세계 12위, 1인당 개인소득 세계 27위. 가히 선진국의 반열에 들었다고 해도 크게 과장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사회는 끊임없이 갈등과 원심력만 증가하는가.

정당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공존하기 어려운 구조로 변했다. 진영 내의 이견이 존중되지 않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연방주의자가 우려했던대로 다수 앞에서 소수는 무력하고 보호받지 못한다. 상대를 경쟁자가 아닌 적으로 여기는 극단적 이분법은 촛불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권력은 자제와 관용을 잊어가고 있다. 상호관용과 자제의 규범이 지켜지지 않으면 정당 간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당파적 적대감을 가져오고 정치양극화로 이어진며 정치는 무능과 탐욕의 심연으로 추락한다. 오늘의 한국정치의 모습이다. 이 고리를 끊기 위한 시동을 집권측이 걸어야 한다.

과도한 권한의 행사는 설사 동기가 순수하고 목적이 선할지라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직면할 수 있다. 당파에 매몰되고 진영에 몰입된 극단적 이분법의 정치는 촛불이 지향하는 정치가 아니다. 촛불의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겸손과 절제의 정신부터 다져야 한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ccr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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