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언덕 끝 베이비박스 앞두고..빗속 유기 영아 숨 거뒀다

황덕현 기자 2020. 11. 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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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 사망 사건 현장 가보니.."박스 안에만 뒀다면" 한숨
경찰 "폐쇄회로 역추적 모친 추정 여성 행적 파악 중"
서울 관악구 난곡동 '베이비 박스' 앞 © 뉴스1 황덕현 기자

(서울=뉴스1) 황덕현 기자 = 3일 오후 지난 1986년 출시, 2000년이 되기 전 단종된 대우자동차 '르망'이 달달 거리면서 서울 관악구 난곡동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서자 발 아래로 빼곡한 주택들도 눈에 띄었다. 멀리 대단위 아파트가 보이고 중간중간에는 다가구·다세대 주택, 연립주택이 즐비했다. 언덕 끝에 다다르자 주사랑공동체 교회 앞 '베이비 박스'라고 쓰인 큰 글씨가 보였다.

베이비 박스가 있는 이곳 교회까지 오가는 버스는 없다. 엄마든 누구든 아기를 맡기려면 가파른 언덕을 한참이나 올라와야 하는 것이다. "트럭이 지나가다가 시동 꺼질 정도의 비탈이다"고 근처에 사는 70대 이모씨는 말했다.

"언덕 어느 쪽으로 오든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지나야 하죠. 엄마도 각자의 고통이 있겠지만…생(生)을 이고 여기까지 오면서 한 번쯤 다시 생각해야 하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A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2일 밤 있던 사건에 안타까워 했다.

사건은 지난 2일 오후 10시10분쯤 벌어졌다. 경찰 등에 따르면 한 여성은 베이비 박스 바로 앞에 있던 공사 자재 더미 위에 영아를 놓고 떠났다. 폐쇄회로(CC)TV 등으로 상황을 뒤늦게 목격한 직원 등에 따르면 엄마로 추정되는 이 여성은 경황 없이 아이를 두고 현장을 떠났다.

약 40분여 뒤인 오후 11시10분께, 서울에는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기상청 방재기상정보시스템 호우실황에 따르면 김포국제공항이 있는 서울 강서구 공항동을 시작으로 내린 비는 밤 12시를 넘겨 3일 오전 0시10분께 관악구에서도 누적 강수량으로 관측됐다. 당시 기온은 8.5도로 쌀쌀했다.

서울 관악구 난곡동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본 동네 모습 © 뉴스1 황덕현 기자

영아가 살아 있었다면 노상에서 1~2시간가량 찬바람을 맞다가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고스란히 맞은 셈이다. A씨는 "안타까워서 CCTV를 볼 수 조차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A씨가 이렇게 안타까워 하는 것은 영아가 생존 상태에서 버려졌을 경우, 베이비 박스가 만들어진 뒤 처음으로 일대에서 생을 마감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는 "(생존해 있었을 경우 베이비) 박스에만 넣어줬다면 절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베이비 박스를 열면 바로 알람이 울려서 10초 안팎에 영아를 받을 수 있다. 박스 내부에는 전기담요도 깔려 있어서 위험요소도 적다.

또 베이비 박스 위에는 캐노피가 설치돼 있는 반면 영아가 놓여있던 곳에는 천장을 가릴만한 게 없어 상황이 더 심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기(遺棄) 영유아 최후의 보루' 베이비 박스는 가족이 키울 수 없는 아이를 임시적으로 데려다 둘 수 있는 장소다. 지난 2009년 만들어졌다. 지난해까지 1600여명 아이를 맡았다. 이곳에 입소한 손바닥만 한 아이들은 입양되거나 보육시설로 인계됐다.

장애가 있거나 영양결핍 상태에서 온 경우는 있었지만 사망 상황은 처음이라는 게 A씨 설명이다. '불가피하게 키울 수 없는 장애로 태어난 아이와 미혼모 아이를 유기하지 말고 베이비룸에 데려다 주세요' 큰 글씨가 건물 벽에 붙어 있었지만 유기한 여성은 이를 보지 못한듯 했다.

서울 관악구 난곡동 '베이비룸' 앞 © 뉴스1 황덕현 기자

경찰은 최초 목격자가 공사 자재 인근 드럼통 아래에서 유기 영아를 발견한 점으로 볼 때 아기가 전날 밤까지는 살아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CCTV에는 엄마로 추정되는 여성이 드럼통 위에 영아를 둔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영아를 두고 간 여성을 찾기 위해 CCTV를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베이비 박스에 찍힌 여성은 흐릿한 형체만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CCTV에 찍힌 여성이 친모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며 "베이비 박스 위치를 몰라서 영아를 잘못 두고 갔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도 사건을 접수한 뒤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베이비 박스 위에는 '꼭 눌러주세요. 당신은 이 아이의 생명을 지켰습니다. 끝까지 기도하고 신중하게 생각해주세요'라는 글귀가 작성돼 있었다.

ac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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