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등쌀에 헐린 강화중성 성문 찾았다

이기환 선임기자 2020. 11. 4.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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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리서 문 허물고 돌담장으로 메운 흔적 나와..정문은 아닌 듯

[경향신문]

몽골군의 침입에 맞서 도읍을 옮긴 고려가 쌓은 강화 중성의 흔적. 몽골과의 강화 이후 몽골의 압력으로 성을 폐쇄한 뒤 돌담장으로 메운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13세기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몽골군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물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물이 부족한 초원·사막지대에 사는 부족이었기에 당연했다.

그런 면에서 고려 조정이 몽골군이 침입(1231년)하자 강화섬으로 피란처를 삼은 것은 신의 한수였다. 고려는 강화섬에 궁성에 해당하는 내성과 도성 격인 중성, 섬 전체를 아우르는 외성 등 3중 성벽을 쌓았고. 모두 여섯 차례의 몽골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았다. 1259년 몽골은 고려를 굴복시키고 화의를 맺으면서 “성벽을 전부 허물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고려는 우선 내성을 허물었다. 하지만 몽골 사신 주자와 도고는 “외성이 남아 있는 한 진심으로 복종했다고 할 수 없다. 외성까지 모두 허물고 돌아가겠다”며 다그쳤다. 이후 강화섬에서는 지금까지도 내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외성의 경우도 고려시대에 축조된 자취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4일 남한 유일의 고려시대 도성 유적인 인천 강화 남산리 일원 강화중성에서 문지(門址)를 최초로 찾아냈다고 밝혔다. 강화중성에서 성문의 흔적을 처음 확인한 것이다.

<고려사> 등에 따르면 강화중성은 몽골과의 항쟁 와중인 1240년(고종 27년)에 축조됐다. 성 둘레는 2960칸이며, 17개의 크고 작은 성문이 있었다. 강화중성은 임시수도 강화를 ‘⊂’ 형태로 둘러싼 토성이며, 현재 확인된 길이는 총 11.39㎞이다.

이번에 발견된 성문의 흔적이 심상치 않다. 성문 터가 돌로 쌓은 담장으로 막힌 채 확인된 것이다. 성문을 허문 뒤 담장을 쌓아 폐쇄했음을 의미한다.

문옥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몽골 사신의 감시 아래 주민과 군인들이 울부짖으며 성을 허물고 돌담장으로 메워버린 뼈아픈 역사의 흔적일 가능성이 짙다”고 분석했다. <고려사> 등에 중성의 폐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 발굴로 외성과 내성을 훼철했을 때 중성도 같이 파괴됐다는 분석이 가능해졌다. 물론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했을 당시 폐기되었을 수도 있다.

성문 터는 남산(해발 223m)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서 확인됐다. 강화도성 서쪽에서 능선을 따라 도성 중심부인 강화읍 관청리 일대로 진입할 수 있는 교통로에 해당한다.

강화중성의 정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성문 터는 너비 4.4m, 길이 5.3m 규모이며, 안쪽에는 성문이, 바깥쪽에는 보도시설이 설치됐다. 성문은 긴 사각형(장방형)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4개의 기둥을 세워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 외곽에는 넓적하고 편평한 돌을 경사지게 깔아 보도를 조성했다. 문지 주변에서는 용머리 모양 장식기와와 평기와, 장식철물, 철못 등 문과 지붕 부재로 추정되는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성벽 윗면에는 기둥목이 세워진 지점을 따라 석렬을 1열씩 설치했다.

성벽 안쪽에는 너비 4.4m, 길이 3.5m 규모의 돌로 쌓은 시설이 확인됐다. 이것은 성 안쪽에서 상부로 오를 수 있는 등성시설로 추정된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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